[메트로신문 장병호 기자] '무뢰한'의 언론시사회 날, 극장을 나서다 다른 상영관에서 막 영화를 보고 나온 전도연(42)의 뒷모습을 봤다. 옆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약간 힘들어 보이는 모습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방금 스크린에서 목격한 김혜경의 애잔한 삶이 떠올랐다.
'무뢰한'의 김혜경(전도연)은 살인자의 애인이다. 한때는 잘 나가는 '텐프로'였던 그녀는 지금은 변두리 단란주점 마담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한없이 쌓여 있는 빚, 그리고 자신을 이용해먹으려고만 하는 남자들 사이에서 김혜경은 사랑이라는 진심을 끝없이 갈구하며 간신히 삶을 버텨낸다. 이영준이라는 이름으로 접근한 형사 정재곤(김남길)이 "빚지기 전에는 무얼 했냐?"며 그녀의 과거를 궁금해 한다. "빚 얻으러 다녔다"는 허망한 대답에는 그녀의 애처로운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언론시사회를 마치고 1주일의 시간이 지난 뒤 인터뷰에서 만난 전도연은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조금 났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촬영할 때는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완성된 영화를 보니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사랑하는 방식이 굉장히 안타깝고 처절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던 것 같아요." 사랑마저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는 서툰 김혜경에게 전도연은 깊은 연민과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무뢰한' 속 세상은 느와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드보일드한 세계다. 이곳에서 인간적인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냉혹한 현실 속에서 영화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그려나간다. 하드보일드에 녹아든 멜로에 전도연은 서슴지 않고 작품을 선택했다. 무엇보다도 남자들에 둘러싸여 수동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김혜경을 대상화하지 않는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다. 이 거친 세계 속에서 이토록 연약한 여자가 어떻게 "공존해서 살고 살아남고 버티고 견뎌내는가"를 보여주고 느끼게 만들고 싶었다.
전도연의 연기는 여전히 빛난다. 영화는 정재곤의 뒷모습으로 시작해 정재곤의 처연한 표정으로 끝나지만 관객 마음에는 그런 정재곤이 지켜본 김혜경의 모습이 더 오래 남는다. 얼음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 순간 전해지는 처절함, 그리고 정재곤을 향해 "진심이야?"라고 물을 때의 그 간절한 표정이 그렇다.
이토록 애잔한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을 연기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인간적인 연민이 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전도연은 "저를 불쌍히 여기면 어떻게 연기를 하냐"며 웃음으로 대꾸했다. 역할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모습에서 그가 왜 프로페셔널한 배우인지를 엿볼 수 있다.
'칸의 여왕'이라는 수식어가 생긴 뒤 전도연은 늘 연기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정작 전도연은 "작품보다 연기가 부각되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럽다"고 털어놨다. "처음에는 제가 영화를 띄엄띄엄 해서 생긴 관심이라고 생각했어요. '칸의 여왕'이라고 불러주는 것도 여전히 고맙고요. 하지만 좋은 작품에서 연기가 더 돋보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연기를 잘 하는 배우라고 해도 티켓 파워가 없다면 사실 힘들어지는 거니까요." 전도연이 지금 바라는 것은 '무뢰한'이 '차이나타운'에 이어 여성 캐릭터 중심의 영화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집으로 가는 길'과 '무뢰한', 그리고 개봉을 앞둔 '협녀, 칼의 기억'과 '남과 여'까지 전도연은 최근 몇 년 동안 조금은 무거운 주제의 작품에서 감정의 폭이 깊은 캐릭터를 연기해왔다. 그러나 의도한 선택은 아니었다. "보고 싶고 찍고 싶은 영화"라는 생각에서 선택했을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칸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로 전도연이라는 배우의 영역을 너무 좁혀놓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전도연은 맨날 저런 역할만 해?'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한국에 저 같은 배우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웃음). 그저 작품 안에 저를 가두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블랙 코미디나 밝은 작품처럼 장르적으로는 언제든 열려 있으니까요."
사진/라운드테이블(김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