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조영남 '대작' 논란이 발생했을 당시 많은 이들을 분노케 한 건 그의 대작 의혹이나 미술계 대작 관행 발언만이 아니었다. 작품 하나를 만들어주고 받은 보수가 고작 10만원에 불과했다는 한 무명작가의 주장이야말로 의분심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조영남 씨 자신은 작품 한 점에 수백, 수천만 원에 거래된다고 알려져 있는데 90%이상 그림을 그려준 이에겐 고작 1점당 10만원을 줬다는 건 누가 봐도 노동착취였을 뿐만 아니라, 자본에 의한 인간의 수단화, 도구주의적 인간관을 읽을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내용과 성격은 다르지만 최근 '흉물' 시비를 낳은 '서울로7017' 설치 작품 슈즈트리(shoes tree)도 예술노동의 대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소위 '재능기부' 형식으로 만들어진 탓이다.
실제로 슈즈트리 제작을 의뢰한 서울시는 높이 17m 길이 100m에 달하는 이 대형 설치 미술 작품을 만드는 데 약 1억 원의 예산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 1억 원에 작가의 몫은 없었다. 지적이 일자 서울시는 예산 구조상 작가 개인에게 대금을 지불할 방법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절차상의 흠은 없을지 몰라도 '슈즈트리'를 만든 작가의 재능기부는 개인이 지닌 재능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의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즉, 재능기부가 오랜 경험과 전문성을 헐값에 구입하고 예술가를 착취하는 도구로 전락한 현실에서 이름 값 좀 하는 예술가의 재능기부와 재능기부를 당연한 듯 여기는 서울시의 행태는 오히려 그동안의 나쁜 관행을 잇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미술계만 해도 재능기부 관련 나쁜 관행의 선례는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과거 한 조각가는 모 미술관으로부터 재능기부형식으로 작품을 기증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보상이라곤 운송료뿐이었다. 작가는 잠시 갈등했지만 미술관 소장품이 된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은 채 결국 작품을 보냈다. 이는 미술관의 권위를 이용해 소장품 목록을 거저 채우려는 질 나쁜 예이면서 차후 합리적 지불에 제동을 거는 좋지 않은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결은 같지 않지만 미술관이 '미술관 프라이즈'라는 괴상한 논리를 내세워 시장가의 절반도 되지 않는 금액으로 작품을 매입하는 것이나, 몇 만원 내외의 초현실주의적인 원고료로 비평을 써달라는 기관, 부산비엔날레처럼 물리적 거리가 예사롭지 않은 곳까지 불러놓곤 겨우 몇 만원 내외의 회의료를 지급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두 공익을 앞세워 소중한 재능을 무료로 사용하려는 변질된 기부개념이 작동한 우리 미술계의 악습이다.
이밖에도 자본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직접 생산자로부터 노동의 성과를 무상으로 취득하는 행위는 우리 주변에 흔하다.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왜 돈에 연연하느냐는 식의 괴이한 발상도 드물지 않다. 서울시만 해도 '슈즈트리' 외, '서울로 7017'이라는 이름과 브랜드 이미지(BI) 역시 재능기부를 통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원순 시장이 워낙 기부를 좋아한다는 건 잘 알려져 있지만 상습적 행정원리로 비춰지는 건 문제가 있다.
물론 사회기여로서의 기부, 진지한 여가라고 할 수 있는 자원봉사, 일상에서 쉽고 재밌게 '나눔'을 행하는 '이지 오블리주(Easy Oblige)', 스스로 행하는 재능기부 자체는 격려할 만하다. 자발적 나눔이 증가하고 나무뿌리처럼 넓고 깊게 뻗어나간다면 기부는 사회적 갈등과 불균형을 해소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이타심의 가장 직접적 실천이라는 점에서 기부문화는 장려되어야 옳다.
다만 재능기부까지 경쟁시켜 심사하는 경우에서처럼 순수한 재능기부를 악용하는 자들에 의한 인식적 폐단과 답습을 고려해야 하고, 재능기부는 공짜라는 비생산자들의 그릇된 의식을 부추기는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 명망 있는 생산자들의 태도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뜻과 다르게 누군가는 예술노동의 대가를 무시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는 데다, 합당한 비용을 요구하는 후배 또는 다른 예술가들을 향한 불편한 관습의 생성에 힘을 보태는 '몹쓸 기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