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人 머니 산업 IT·과학 정치&정책 생활경제 사회 에듀&JOB 기획연재 오피니언 라이프 AI영상 플러스
글로벌 메트로신문
로그인
회원가입

    머니

  • 증권
  • 은행
  • 보험
  • 카드
  • 부동산
  • 경제일반

    산업

  • 재계
  • 자동차
  • 전기전자
  • 물류항공
  • 산업일반

    IT·과학

  • 인터넷
  • 게임
  • 방송통신
  • IT·과학일반

    사회

  • 지방행정
  • 국제
  • 사회일반

    플러스

  • 한줄뉴스
  • 포토
  • 영상
  • 운세/사주
오피니언>칼럼

[홍경한의 시시일각] '밋밋함과 진부함'…광주·부산비엔날레

홍경한 미술평론가



7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광주비엔날레는 비엔날레 역사상 가장 많은 기획자들이 참여했다.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에다 전시 총괄 큐레이터까지 겸한 김선정 씨를 포함해 무려 11명이 전시를 꾸렸다. 기획자가 많아서인지 여타 비엔날레에 비해 규모는 큰 편이다. 그렇다고 카셀도큐멘타처럼 서너 일가량 돌아볼 정도는 아니다.

전시는 놀라움을 선사한다. 여타 비엔날레에 비해 적게는 두 배에서 많게는 네다섯 배에 달하는 예산과 인적자원으로 어떻게 그토록 밋밋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었는지 의아해서 그렇다. 일례로 주제전 구성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상투적이다. 주제의식보다는 구조가 먼저 드러나고, 형식 또한 들쑥날쑥 작은 기획전들을 각각의 공간 아래 몰아넣은 모양새를 띤다. 흥미롭게도 각각의 섹션은 서로 유연하게 통합되지 못한 채 각자 하고 싶은 말을 내뱉는다.

내용은 더욱 평범하다. 도시, 환경, 난민, 광주의 역사 등을 다뤘지만 비엔날레 특유의 급진성은 떨어진다. 획기적인 사회·문화적 담론 또한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비엔날레자체만 해도 광주만의 특성은 물론 한국 대표 비엔날레로써의 문화예술적 나침반 역할에 힘이 부친다. 부자 비엔날레답게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다양한 장소에 다양한 작품을 쏟아 놓았으나 속보단 포장을 잘했다는 인상이 강하다.

기대했던 부산비엔날레도 실망스럽긴 매한가지다. 흔한 기획전을 확대한 전시라는 여운을 심어준다.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규모를 축소했다지만, 크기로 승부해온 여타 비엔날레들에 비해 발품을 덜 팔아도 된다는 의미에서 나아가지 못한다. 규모의 축소가 곧 주제의 명징함을 뒷받침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규모 축소=집중도'라는 등식은 특별할 것 없는 기획력과 준비부족을 감추기 위해 급조된 알리바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게 한다.

애석하게도 부산비엔날레는 전 세계의 영토적 민족적 분열과 심리적 분리에 다가서기도 전에 '관객의 분리'부터 생성한다. 유독 넘치게 등장하는 남북분단 관련 이슈 중 일부는 신파적, 단선적 사고에서 전개되고, 어설픈 낭만주의적인 작품들은 되레 현실의 엄혹함을 은폐한다.

전반적으로 진부한 탓에 에바 그루빙거의 '군중'처럼 뜻밖의 인내심을 요하나, 다행히 눈에 띄는 작품이 없는 건 아니다. 그중 하나가 헨리케 나우만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통독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우회 없이 드러내는데, 영토와 정치적 통합이 심리적 분할을 극복하지는 못했음을 서술한다는 점에서 미래의 한국 상황에 참조할 만하다.

또 하나의 작품은 이스라엘 태생의 작가 야엘 바르타나의 '인페르노'다. 상파울로 솔로몬신전을 모티프로 한 이 픽션은 역사성과 종교성, 민족성에 관한 분리와 균열을 웅장함과 비장함으로 보여준다. 이밖에도 아프리카가 처한 현실과 가상, 과거·현재·미래를 버무려 SF적 문화미학을 엿보게 하는 와누리 카히우의 '불모의 땅', 시민참여형 작품인 오귀스탱 모르의 '말할 수 없는 것들'도 눈길을 끈다.

한편 개막 전부터 화제가 된 광주비엔날레의 북한미술은 그야말로 '선전'의 장이다. 22점의 북한 그림은 조형적으로 꽤나 리얼리티하며, 모처럼 회화의 '손맛'까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삶의 리얼리티를 읽을 수는 없다. 고난 속에서도 웃음기 가득한 인물들은 체제 속 유토피아를 가리키고, 연극 같은 동작은 인위적 기호처럼 다가온다.

이와 관련해 기획자로 참여한 문범강 씨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벗어나면 북한미술의 예술성이 보인다"고 했는데, 애써 관람자의 가치판단을 제어하려 노력할 필요 없다. 선전화는 단지 선전화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홍경한(미술평론가)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Copyright ⓒ 메트로신문 & metr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