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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국방/외교

한국전쟁, 진짜 종전은 국군포로 송환이다.

탈북 국군용사 유영복 선생이 11일 서울 역삼동 픽쳐러스 스튜디오에서 기념촬영에 앞서 참석자들에게 북한에서 국군포로의 실상을 전하고 있다.



지난 11일은 제1차세계대전의 총성이 멎은지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지금 한반도에서도 종전의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진짜 종전은 남북 양측이 찔러서 아픈 기억마저 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눈에 보이는 GP철수, 한강하구 조사만이 찔러 아픈 부분이 아닐 것이다.

탈북 한국전쟁(6.25) 국군포로들이야 말로 진정한 종전을 위해 치유돼 야 할 아픔일 것이다.

기자가 11일 서울 역삼동 픽쳐러스 스튜디오에서 만난 탈북 국군포로 유영복 선생(88)은 90을 바라보는 노인이라기에는 너무나 강건한 모습이었다.

그는 기자에게 "포로가 된 것이 자랑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국군의 후배들에게 조국은 당신들을 영원히 잊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기위해서는 정부가 국군포로 문제에 나서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는 것을 TV로 보고 탈북을 결심했다는 그는 북한에서 목격한 국군포로의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적대계급으로 분류된 국군포로들은 개전초기에는 수용소에 수용됐지만, 북한이 고전하자 국군포로들은 탄광 등 힘든 노역장으로 끌려가거나, 인민군에 편입됐다.인민군에 편입된 국군포로들은 전투 중에 남쪽으로 넘어갈 기회를 엿보려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 북한은 한국전쟁 포로에 대한 상호 교환이 이루어진 1954년 이후 "강제 억류 중인 국군 포로는 공화국에 한 명도 없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2014년 "8만2000명의 한국군이 한국전쟁 이후 실종됐고, 5만~7만명이 북한과 그 동맹 국가(중국)에 억류됐다"고 추정했다. 당시 기준으로 북한에 생존한 국군포로는 500여명이었다.

이들이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은 북한만의 책임은 아니다. 정치이념 논리에 막혀 그들은 소외됐어야 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국군포로는 북한의 부역자로 비춰졌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는 국군포로들의 북한 가족문제들을 고려해 자유왕래를 고려했지만, 정작 북한과 종전협정을 맺고, 최전방 GP 철수와 공동유해발굴을 실시하고 있는 현 정부에서는 이렇다 할 방안을 내놓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국가유공자 리멤버 코리아 보훈가족 안종민 사무국장(퇴역 육군 대위·44)은 "정부가 하지 않던 일들을 민간에서 하려는 움직임은 꾸준히 있었다. 남북이 공식적으로 할 수 없다면, 민간에서 물밑 접촉을 할 수 있게라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국군포로의 무제를 덮고 넘어간다면, 역사의 아픔은 다른 형태로 반복될 지 모른다.

100년 전 11일 콩피에뉴의 열차에서 독일 대표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와 연합군 대표인 프랑스 포슈 원수는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36일 간의 휴전협정은 두 차례 연장 끝에 사실상 종전협정이 됐다.

하지만 굴욕적 베르사유 조약 체결로 에르츠베르거는 1921년 암살됐고, 2차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독일의 히틀러는 콩피에뉴의 열차를 끌어내 열차에서 프랑스군의 항복문서를 받아냈다.

더욱이 항복문서에 조인했던 막심 베이강 장군은 포슈 원수의 참모장이었다. 역사의 기구함을 우리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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