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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43) 100년 전 독립선언서 인쇄한 '보성사 터'··· "지금은 찬밥신세"

보성사를 기념하는 조형물 '3인의 군상과 민족 정기'./ 김현정 기자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의암 손병희는 민중 독립의 염원을 모아 3·1운동의 불씨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는 일본 유학 시절이던 1905년 동학의 친일 분파였던 일진회, 진보회와 단절하기 위해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 교육을 통한 구국의 길을 모색했다.

◆3·1독립운동의 비화

1919년 1월 한반도에 독립운동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일제가 고종 황제를 독살했다는 소문을 접한 학생들은 만세운동에 함께하기로 뜻을 굳혔다. 손병희는 천도교 대표 자격으로 기독교계 이승훈, 불교계 한용운 등의 인사와 교섭했고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33인의 서명을 받았다.

독립선언서는 '보성사'에서 인쇄됐다. 보성사는 보성학교 설립 당시 교재를 출판하기 위해 만든 부설 인쇄소였다. 주로 천도교 관련 서적, 기관지, 교과서 등이 인쇄됐다. 적자 운영이 계속되자 천도교의 한 간부가 보성사 폐업을 건의한 적도 있지만 손병희가 "언젠가 중요하게 쓰일 날이 있을 것"이라며 만류했다고 전해진다.

보성사는 손병희와 친분이 두터웠던 천도교측 인사인 이종일이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족보를 인쇄하는 것으로 위장막을 쳤다. 밤늦도록 기계 소리가 멈추지 않자 이를 수상히 여긴 종로경찰서 소속 신승희 형사가 인쇄소에 들이닥쳤다. 이종일은 신 형사에게 "같은 조선 사람끼리 한 번만 눈 감아 달라"고 사정했다. 당시 손병희가 신 형사에게 5000원이라는 거금을 건네 위기를 넘겼다는 설도 있다. 3·1운동 이틀 전인 1919년 2월 27일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 3만5000부 인쇄가 완료됐다.

◆수모 겪는 3·1운동 성지

25일 오후 '보성사 터'가 위치한 수송공원의 바닥은 비둘기 똥으로 뒤덮여 있었다./ 김현정 기자



지난 24~25일 독립선언문이 인쇄된 역사적인 장소, '보성사'를 찾았다. 보성사는 1919년 6월 28일 밤 일제가 불태워 현재는 터만 남아 있었다. 보성사 터는 조계사 후문 맞은편 수송공원 내에 위치해 있었다.

24일 오후 보성사 터에서 만난 직장인 이정복(55) 씨는 "근처에 사무실이 있어 산책할 겸 나왔다"면서 "독립선언서가 인쇄된 장소인지 오늘 처음 알았다"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이 씨는 "사실 비둘기 똥이 너무 많아서 여기까지는 잘 안 오게 된다"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인데 너무 방치해 놓은거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공원 바닥은 새똥으로 뒤덮여 있었고 벤치에는 노숙인들이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근처에 조계사가 있어 공원 옆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았지만 보성사 터를 찾는 이는 드물었다.

25일 오후 보성각 터를 찾은 시민들이 수송공원을 둘러보고 있다./ 김현정 기자



이날 수송공원을 찾은 오성건(73) 씨는 "보성사가 없었다면 3·1운동이 그렇게 전국적으로 퍼지지 못했을 것"이라며 "바닥에 담배꽁초가 정말 많은 데 누가 좀 나서서 관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보성사 터에는 이곳에 과거 보성사가 있었음을 알리는 동판과 조형물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보성사를 기념하는 조형물 '3인의 군상과 민족 정기'는 전체 높이 6.35m(조형물 5m, 좌대 1.35m), 면적 9.41㎡ 규모로 만들어졌다. 화강석과 청동으로 이뤄져 있고 상부 청동구조물은 3인의 군상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치켜든 모습을 하고 있다. 하부 석제조형물에는 보성사의 옛모습과 3·1운동 장면이 양각됐고, 기미독립선언서는 음각됐다. 맨 밑의 석판은 가로·세로 3.1m로 제작해 3·1운동이 우리 민족사의 초석이 되었음을 상징한다. 전체적으로 민족의 얼을 상징하는 조형물은 위에서 보면 태극문양 형식을 취하고 있어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고 전해진다.

25일 수송공원에서 만난 시민 임모(29) 씨는 "손바닥만한 공원에 표지석이 10개는 되는 것 같다"면서 "현재 있는 안내푯말도 다 낡아서 글씨가 잘 보이지도 않는다. 3·1운동 100주년이라는데 이런 것 좀 정리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인상을 찌푸렸다.

25일 수송공원에는 보성사 터를 알리는 조형물 외에 여러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김현정 기자



실제 공원에는 보성사 터를 알리는 조형물 외에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 터'와 '신흥대학 터'를 알리는 표지석, '화가 고희동 표석' 등이 세워져 있었다.

이기훈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흉상이나 안내판들이 만들어진 지 벌써 몇십 년이 지났다"면서 "그 자체로 역사적 가치가 있어 당시 이런 것을 기념했구나를 보여주는 흔적이라 함부로 손대기 어려운 면이 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시간대를 달리해 여러 건물들이 들어섰던 장소인데 이곳에 대한 종합적인 안내가 없어 이상해 보이긴 하다"며 "당시 역사적인 상황을 정리해 종합적으로 안내해주는 표지판이나 이런 게 있으면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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