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한의 시시일각] 정치적 수단에 불과한 공동체와 미술

▲ 홍경한(미술평론가)

지정되거나 특정된 장소나 공간주변의 상태와 특징 등을 고려해 그 장소와 미술이 유기적 의미를 갖게 되는 미술이 '장소특정적미술'이다. 작품이 놓이는 물리적 장소는 물론, 개념으로서의 공간 그리고 어떤 상황에 비판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국내에서 장소특정적미술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 시기는 조형예술품의 설치가 의무화된 1990년대 중반이다. 당시만 해도 장소특정적미술은 단일 사이트 내 물리적 환경 개선이라는 틀에 머물렀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장소특정적미술은 공동체와의 협업이나 관계를 통한 '더 나은 삶을 위한 비전 제시'로 방향이 바뀌고 있다. 이른바 '공동체 기반 공공미술'이다.

일차원적 공공미술이 어떤 작품을 단지 실내에서 바깥으로 장소를 옮긴 것에 불과하다면, 공동체 기반 공공미술은 장소와 공동체를 비롯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문화적 이슈들과 실제 사람을 근간으로 한다. 동일한 모더니티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한 '사회적 의사'로써의 미술에 무게를 둔다.

그러나 한국의 실정에서 공동체 기반 공공미술은 이론으로만 존재한다. 실제 사람이 참여해 협업하거나 관계 맺는 방식은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질뿐더러, 주체로서의 시민이 미술 형식을 빌려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현상은 보기 드물다. 당연히 미술이 언급할 더 나은 삶을 위한 비전 제시는 기대하기 어렵다.

대신 공동체 기반 공공미술은 기관의 선전 도구로 기능하며, 정치적 수단화 내지는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이라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접근방식 또한 과거의 공공미술 패턴을 따른다. 공원이나 공항에 미술작품을 앉히거나, 지하철에 미술작품을 들여놓는 등 공동체를 어미로 하지만 사실은 장식에 불과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지자체는 새로운 관료정책이라는 문제의식에 허약한 채, 어쩌면 각도가 다른 또 하나의 규범주의적 프로젝트일 수 있는 이벤트를 혈세를 써가며 무분별하게 양산하고 있다. 가시적 결과물이 뚜렷해 무언가 지역발전에 공헌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에 의해 공동체와 미술이 정치적 수단화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대도시를 벗어나면 더욱 심화된다. 미술에 관한 지자체장의 막연한 정책적 신념은 사회적 의사와 상관없는 공동체를 소환하며, 시민들의 삶과 직접 연관된 이슈에 관해 대화를 시도하긴커녕, 여전히 어떤 장소에 커다란 오브제 덩어리를 들여다 놓는 심미적 차원의 미술을 공동체 기반 공공미술로 착각한다.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공공미술은 미술품이 놓이는 장소와 사물에 대한 자각, 위치 변화에 따른 대상의 지위와 감각이 달라지는 공간의 맥락성을 중시한다. 삶의 장소에 흡수되어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미술, 미술 형식을 빌린 시민들의 직접적 예술실천을 통한 사회적·문화적·도시적 상호작용으로서의 긍정성에 방점을 둔다.

이는 예술의 일시적 소비나 미술의 자본화를 통한 거주민의 거주공간과 평온한 일상을 황폐화시키는 도시재생으로서의 쓰임새와는 결이 다르다. 장소와 공동체가 단지 미술가의 작업재료로 대상화되는 공동체의 소재화와, 익히 폐기되었어야 할 불순한 목적의 기념비를 생산하는 것과도 거리가 있다.

하지만 동시대 한국에서의 공동체 기반 공공미술은 그것이 어떤 이름(장소특정적미술, 관계특정적미술, 공공미술,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 커뮤니티아트 등등)으로 불리든 상관 없이 그 지역과 공간, 장소에 실재하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무관하게 행위되고 작동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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