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가 다른 나라들을 위해 수년 동안 보상도 없이 해상 항로를 지켜줘야 하는가." 2019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남긴 말이다. 당시 호르무즈 해협에서 유조선 피격 사건이 발생하자 이 같은 글을 남긴 것이다. 2026년 3월 현재,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일본 등 5개 국가에 군함을 파견하라고 요구했다. 그의 기본적인 인식을 생각하면 이런 요구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 초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호르무즈 해협의 상선들을 호위해주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을 조금이라도 오래 관찰했던 사람들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 국내 한 중동 전문가는 "분명히 한국이나 일본 등 동맹들에게 군함을 보내라고 요구할 것"이라고 사실상의 '예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요구를 들어줘야 할까. 트럼프 행정부 1기 시절 미국이 이란 핵합의 탈퇴가 없었다면, 중동 긴장 상황은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우리는 주유소에 기름 넣으러 가면서 겁 먹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고, 주식시장 상황을 보며 조마조마할 일도 없었다. 그러니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형적인 책임전가다. 그런데 아무도 선뜻 응하지 않는다. 20여년쯤 전 이라크 파병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다. 그 시절 미국은 '세계의 경찰' 노릇을 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은 예측 불가능하고, 동맹에는 비용을 전가하고 있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 지위를 유지하며 얻었던 지정학적 영향력과 달러 패권은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 유지 비용만을 동맹에 전가하는 것은 지독한 모순이다. '경찰 노릇'은 그만두면서도 '통행료는 내라'는 식의 논리로는 동맹의 호응을 얻을 수 없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이 단순한 논리를 지난해 관세 폭탄 사태를 통해 이미 깨달았다. 미국과 동맹국 간 신뢰가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미국일 수 있었던' 이유도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호르무즈 해협을 향한 동맹국들의 망설임과 미적거림은 단순히 국익과 군사적 이익 등을 고려한 판단을 넘어섰다. 이 순간을 통해 우리는 지금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던 미국의 권위가 무너지고, 팍스 아메리카나가 실질적으로 종언을 고하는 장면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예진기자 syj@metroseoul.co.kr
2026-03-18 15:11:58 서예진 기자
몇 해 전 주말 오전이었다. 학원가가 한가할 시간인데도 유독 그 학원 앞만 북적였다. 엄마 손을 잡은 아이들이 줄지어 들어갔고, 나 역시 아이의 레벨테스트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시험을 마치고 나온 아이는 금세 장난감 얘기부터 꺼냈다. 그만큼 아이는 어렸고, 시험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아이는 그 학원에 들어갔고 영어는 빠르게 늘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초등학교에 간 뒤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영어 학원도, 수학 학원도 입구에는 늘 레벨테스트가 있었다. 학원만 바뀌었을 뿐, 아이들은 분반과 선발의 문턱 앞에서 계속 경쟁해야 했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학원법 개정안은 유아 대상 학원의 입학 전 레벨테스트를 원천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른바 '4세 고시', '7세 고시'로 불리며 조기 경쟁을 부추겨 온 관행에 제동을 걸겠다는 취지다. 방향에는 공감한다. 유아를 시험대에 세우고, 그 결과로 줄을 세우는 관행은 분명 과했다. 문제는 이 조치만으로 경쟁까지 멈출 수 있느냐는 점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내 아이도 유아 시절 레벨테스트를 거쳤고,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금도 사교육에서 자유롭지 않다. 눈에 띄는 성과를 경험한 터라, 사교육의 문턱 앞에서 쉽게 발길을 돌리기 어렵다. 그래서 정부가 영유아 레벨테스트를 금지하고 사교육 규제에 나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4·7세 고시'는 이미 지나왔지만, 경쟁이 계속되고 공교육이 그 수요를 충분히 채우지 못하는 한 사교육은 멈추기보다 우회로를 찾고, 결국 더 음지로 스며들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 현장도 비슷한 방향을 가리킨다. 서울시교육청이 발표한 사교육 인식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유아 대상 영어학원에 다니거나 다닌 적이 있다는 응답은 전체 29%였다. 하지만 서초구는 56%, 강남구는 52.5%로 절반을 넘었고, 강북구는 14.7%, 중랑구는 13.7%에 그쳤다. 같은 서울 안에서도 조기 사교육의 출발선이 다르다는 뜻이다. 선행학습 속도 역시 학군지에서 더 빨랐다. 경제적 격차가 곧 교육 격차로 이어지고 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얘기다. 교육부가 이달 발표한 2025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도 곱씹어볼 만하다. 지난해 사교육비 총액은 27조5000억원으로 전년보다 5.7% 줄었고 참여율도 75.7%로 4.3%p 낮아졌다. 겉으로 보면 사교육 부담이 다소 꺾인 듯하다. 그러나 사교육에 참여한 학생만 놓고 보면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60만4000원으로 오히려 늘었다. 서울은 초등학생 60만1000원, 중학생 66만4000원, 고등학생 76만7000원으로 전국 최고 수준이었다. 사교육을 받는 학생 수는 줄어도, 받는 학생에게 들어가는 비용과 경쟁은 더 짙어지고 있는 셈이다. 중국 사례는 규제의 한계를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몇 해 전 중국 정부는 '솽젠' 정책으로 교과 사교육을 강하게 막았지만, 이후 사교육은 사라지기보다 음지로 파고들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재력과 인맥이 있는 가정은 우회로를 찾았고, 그렇지 못한 가정은 더 뒤처졌다. 경쟁이 그대로인 상황에서 규제만 앞세우면 사교육은 멈추기보다 더 은밀하고 비싼 형태로 이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사교육은 금지한다고 곧바로 사라지지 않는다. 부모를 움직이는 것은 시험 자체보다도 뒤처질 수 있다는 불안이다. 사교육을 줄이려면 사교육만 단속해서는 부족하다. 부모들이 왜 이렇게 이른 시기부터 불안해지는지, 왜 아이 손을 잡고 학원 문 앞에 서게 되는지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4세 고시'를 멈추겠다면, 이제는 시험만이 아니라 그 경쟁을 키우는 구조까지 함께 바꿔야 한다. /이현진기자 lhj@metroseoul.co.kr
2026-03-17 10:32:57 이현진 기자Copyright ⓒ Metro. All rights reserved. (주)메트로미디어의 모든 기사 또는 컨텐츠에 대한 무단 전재ㆍ복사ㆍ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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