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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종이 한 장

민주주의는 생각보다 사소한 물건 위에 서 있다. 투표소 책상 위에 놓인 투표용지 한 장이 그렇다. 유권자가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이번 6·3 지방선거에서는 그 종이 한 장이 부족했다. 지난 3일 일부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모자라 유권자들이 기다리고,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가 중단됐다가 재개되는 일이 벌어졌다. 민주주의를 관리한다는 기관에서 나온 사고라고 하기엔 너무 기초적이라 어처구니를 어디 가서 찾아야 할 지 모르겠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우리 헌정질서에서 특수한 위치에 있다. 과거 독재 정권이 선거를 마음대로 휘둘렀기에, 헌법을 통해 정권도, 정당도, 국회도 함부로 선거를 흔들 수 없도록 독립성을 보장해줬다. 선관위가 흔들리면 선거가 흔들리고, 선거가 흔들리면 민주주의가 흔들린다. 그래서 선관위는 누구보다 엄격해야 한다. 그런데 그동안 선관위는 그 엄격함의 잣대를 남에게만 적용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투표용지 부족이 발생한 투표소가 50곳이라고 했다. 며칠 뒤 다시 확인하니 91곳이었다. 투표용지 숫자도 못 세더니, 이젠 투표소 숫자도 못 세는건가. 올림픽공원 시위에 참가한 일부 '부정선거론자'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들은 '사전투표용지에 QR코드가 있어, 선관위는 유권자들이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알고 결과를 조작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조차 안 되는 말을 뭔 수로 옹호하나. 가장 큰 문제는 선관위가 '부정선거론자'들에게 먹잇감을 줬다는 점이다. 선거관리는 인간이 하는 일이니 실수가 없을 수는 없지만, 이번 건은 너무 치명적이다. 이러니 대통령과 국회의장까지 나서서 선관위를 개혁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투표용지 수요 예측, 현장 보고 체계, 비상 공급망, 책임자 문책, 사후 검증 방식까지 모두 들여다봐야 한다. 무엇이 틀렸는지, 누가 판단했는지, 왜 늦었는지 국민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공개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거창한 구호로 굴러가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에 투표소가 열리고, 유권자 명부가 준비되고, 투표용지가 충분히 놓여 있어야 한다. 이 기초적인 신뢰를 잃으면 민주주의는 흔들린다. 투표용지 부족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방만 운영을 걷어치워야만 민주주의가 살 수 있다. /서예진기자 syj@metroseoul.co.kr

2026-06-09 14:47:13 서예진 기자
[기자수첩] '고점판독기' A씨의 월요일

#. 투자자 A씨는 8일 장 초, 자신의 주식 계좌를 보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코스피가 개장 직후 8% 넘게 급락하며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됐다. 원·달러 환율은 1560원을 넘어섰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반도체주도 속절없이 밀려났다. 유명한 '인간 고점판독기'인 A씨의 계좌도 이 충격을 피해 가지 못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주식 시장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기뻐해야 한다. 지금은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이슈가 됐지만, 계좌에 찍힌 파란 숫자까지 지워주지는 못했다. 하루 만에 전체 수익률의 10%가 증발했다. 순간 '지금이라도 팔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밀려드는 업무에 MTS앱을 껐다. 불과 사나흘 전만 해도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지난 2일 코스피는 8800선을 돌파했고 시장은 '1만스피'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과 인공지능(AI) 열풍, 자본시장 활성화 정책에 대한 기대가 시장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8일 아침 시장이 마주한 풍경은 전혀 달랐다. 미국 고용지표가 예상치를 크게 웃돌면서 금리 인상 우려가 커졌고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는 10% 넘게 급락했다. 환율은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며칠 전까지 낙관론을 이야기하던 시장은 이제 공포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시장을 오래 지켜볼수록 한 가지는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시장은 언제나 자신을 설명할 '이유'를 찾아낸다는 점이다. 오를 때는 더 오를 이유를 찾고, 내릴 때는 더 내릴 이유를 찾는다. 코스피 9000 전망이 쏟아질 때는 위험이 잘 보이지 않고,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된 날에는 희망마저 사라진 듯 느껴진다. 금리와 환율, 외국인 수급, 중동 정세 모두 중요한 변수다. 앞으로 시장이 더 흔들릴 가능성도 충분하다. 다만 하루 만에 바뀐 것은 주가이지 기업의 경쟁력까지는 아니다. 브로드컴 주가가 급락했다고 해서 반도체 공장이 멈춘 것은 아니다. 미국 고용지표가 예상보다 잘 나왔다고 해서 인공지능(AI) 투자 수요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래서 시장이 크게 흔들리는 날일수록 숫자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코스피가 몇 포인트인지, 환율이 얼마인지, 외국인이 얼마를 팔았는지는 매일 바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투자자들이 다시 들여다보는 것은 결국 기업의 실적과 경쟁력, 그리고 펀더멘털이다. ps. A씨는 멀리 있지 않다. 나흘 전 '9000피' 기획기사를 준비하다 오늘은 '검은 월요일' 발생기사를 쓰고 있는 기자 본인이다. /허정윤기자 zelkova@metroseoul.co.kr

2026-06-08 13:50:51 허정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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