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로 만들어내는 긴장감
1998년 전라남도 여수. IMF 경제 위기는 이 작은 어촌 마을의 활기까지 빼앗아 가버렸다. 여수 앞바다를 주름잡던 전진호도 이제는 만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폐선의 위기에 처해 있다. 선장 철주(김윤석)는 자식과도 같은 선원들에게 마지막으로 큰돈이라도 남겨주기 위해 조선족의 밀항을 돕는 위험천만한 선택을 감행한다. 그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해무'(감독 심성보)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성에 대해 파헤치는 영화다. 극단 연우무대의 동명 연극이 원작으로 지난 2001년 발생한 제7호 태창호 사건이 모티브가 됐다. 김윤석, 문성근, 이희준, 김상호, 유승목 등 연극 무대 출신 배우들과 JYJ 멤버 박유천, 그리고 충무로의 유망주로 떠오르고 있는 한예리 등이 한 배에 탄 사람들로 호흡을 맞췄다.
영화는 '살인의 추억'에서 감독과 각본가로 만났던 봉준호-심성보 콤비가 기획·제작과 감독으로 다시 만나 화제가 됐다. '해무'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화성연쇄살인사건을 통해 1980년대의 한국 사회를 조망했던 심성보 감독은 '해무'에서는 199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단면을 담아낸다. IMF 경제 위기로 인해 내몰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영화의 가장 중요한 테마다. 돈과 욕망, 사랑 등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만을 생각하며 오직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선원들과 밀항자들의 갈등에서는 '설국열차'가 다룬 계급 차이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해무'는 사회 시스템이 지닌 부조리함보다 그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내면에 관심을 보인다. 오해에서 비롯되는 예상 밖의 사건들, 그리고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인물들의 행동은 관객들로 하여금 '살아남는다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고민하게 만든다.
짙은 안개 속에 갇힌 배처럼 영화는 탈출구가 없는 먹먹함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그 깊은 무게감을 견뎌내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해무'는 화려한 볼거리 없이 인물과 이야기만으로 영화를 탄탄하게 이끌어가는 연출력으로 눈여겨볼 작품이다. 웃음과 감동, 카타르시스를 담아낸 여름 대작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현실의 무게감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서 어떤 반응을 이끌어낼지 궁금하다. 청소년 관람불가. 13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