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 속에서 길어 올리는 특별한 감동
여장부(차태현)는 세상을 남들보다 느리게 바라본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동체시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남다른 능력을 가졌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는다. 유일한 친구였던 수미마저 떠나버리자 여장부는 세상과 벽을 쌓은 채 유년 시절을 보낸다. 여장부에게 세상은 좁은 단칸방이 전부이고 TV 드라마만이 바깥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다.
"진짜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더 늦기 전에 밖에 좀 나가봐야겠다." '슬로우 비디오'(감독 김영탁)는 주인공 여장부 역을 맡은 배우 차태현의 나직한 내레이션으로 막을 연다. 무심한 듯 그러나 친근한 목소리는 영화가 어떤 정서를 담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영화는 주인공 여장부가 CCTV 관제센터에서 일하면서 혼자만의 세상에서 벗어나 '진짜' 세상과 마주하게 되는 과정을 따뜻한 감성으로 그린다.
동체시력이라는 독특한 소재, 그리고 CCTV 관제센터라는 이색적인 공간 등 특이한 설정들이 눈에 띈다. 그러나 영화의 지향점은 김영탁 감독과 차태현이 함께 했던 전작 '헬로우 고스트'처럼 평범함 속에서 특별한 감동을 길어 올리는데 있다. 사람들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주인공이 주변 인물들을 통해 변화를 겪는다는 스토리 라인, 그 속에 소소한 웃음과 슬픔을 한데 버무려낸 점도 전작과 비슷하다. '헬로우 고스트'처럼 지극히 착한 영화다.
연출적인 부분은 전작보다 더 섬세해졌다. CCTV 관제센터의 커다란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인물들을 배치한 미장센, 대학로 거리를 연극 무대로 삼아 노래를 부르는 수미(남상미)의 모습, 여장부의 단칸방을 마을의 지도로 가득 채운 신처럼 동화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신들이 눈에 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영화가 담아낸 공간들이다. 서울을 무대로 하고 있지만 영화는 그 흔한 고층빌딩 하나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무수한 골목길의 풍경들로 채운다. "다들 너무 빠르고 바쁘게 산다 .내가 보듯이 가끔은 느리게 흐르면 좋을텐데"라는 여장부의 말처럼 영화는 골목길의 정취를 담아 작은 위안을 선사한다.
감시의 수단인 CCTV를 지극히 인간적인 수단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 주변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부족한 점 등 아쉬운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슬로우 비디오'가 전하는 한편의 동화 같은 따뜻함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12세 이상 관람가. 다음달 2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