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체시력 지닌 독특한 캐릭터 변신
기존 코믹함 벗고 다른 패턴의 연기 시도
차기작 '엽기적인 그녀2' "견우 다시 보고 싶어"
차태현(38)이 출연하는 영화라면 한 가지만큼은 믿고 볼 수 있다. 바로 '편안함'이다. 그의 연기는 역할에 완벽하게 몰입하는 메소드 연기와는 거리가 멀다. 대신 그는 어떤 역할이든 자신만의 것으로 체화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감정을 전달한다. 엉뚱하고 독특한 캐릭터라도 그를 만나면 마치 이웃에 사는 친근한 인물처럼 다가오는 이유다.
2년 만의 스크린 컴백작인 '슬로우 비디오'(감독 김영탁, 10월2일 개봉)에서 차태현은 남들에게 없는 독특한 능력을 지닌 인물을 연기했다. 이름마저도 특이한 여장부다. 찰나의 순간까지 포착할 수 있는 동체시력을 지닌 여장부는 세상을 다른 사람들보다 느리게 바라본다. 영화는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세상과 벽을 쌓고 지냈던 여장부가 CCTV 관제센터에서 일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웃음과 감동으로 담아냈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주변에서는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는 반응도 있었다. 김영탁 감독만의 남다른 상상력을 글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었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차태현이 '슬로우 비디오'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헬로우 고스트'로 김영탁 감독과 한 차례 작업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김영탁 감독의 감성과 잘 맞아요. '헬로우 고스트'를 하면서 감독님이 과잉되고 튀는 것보다 담백하고 건조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걸 좋아함을 알게 됐거든요. 처음 시나리오는 완성된 영화보다 더 독특했어요. 편집 과정을 거치고 내레이션이 들어가면서 보다 친절한 영화가 됐죠. 김영탁 감독의 성장기를 보는 것 같아요(웃음)."
차태현은 '슬로우 비디오'를 코미디가 아닌 멜로라고 생각하며 촬영에 임했다. 여장부가 자신의 첫사랑을 닮은 수미(남상미)를 만나 동화 같은 로맨스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스토리의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연기에서도 기존의 코믹한 모습과 거리를 뒀다. 오달수·고창석·김강현·진경 등 조연진들이 크고 작은 웃음을 만들어낼 때 차태현은 선글라스를 쓰고 이들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대사도 많지 않고 눈도 가려야 하는 만큼 감정 표현에 대한 고민도 컸다. 수미가 여장부의 선글라스를 벗기는 신이 그랬다.
"관객들이 여장부의 감정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이었어요. 시나리오에 '수미가 여장부의 선글라스를 벗겼을 때 순수한 눈이 보인다'고 적혀 있는데 이 '순수함'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큰 기대 없이 연기했는데 그 장면이 완성된 영화에서는 생각보다 임팩트 있게 다가와서 저도 놀랍더라고요."
차태현은 '슬로우 비디오'를 통해 자신의 연기의 폭이 조금은 넓어질 기회를 얻기를 바라고 있다. 기존 코미디에서는 10명 중 8명을 웃길 수 있는 대중적인 코드의 연기를 했다면 '슬로우 비디오'에서는 10명 중 6명 정도가 웃을 수 있는 다른 패턴의 연기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관객들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증이 크다.
하지만 흥행 기대와는 별개로 완성된 영화에는 만족한다. "영화는 감독님의 색깔이 묻어나는 것이 좋다"고 믿는 차태현에게 '슬로우 비디오'는 김영탁 감독의 색깔이 충분히 잘 담긴 작품이기 때문이다. 차기작으로 '엽기적인 그녀'의 속편 '엽기적인 두 번째 그녀'를 선택한 것도 '품행제로'로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준 조근식 감독이 연출을 맡은 이유가 크다. "조근식 감독님의 '품행제로'를 정말 좋아했어요. '엽기적인 두 번째 그녀'도 조근식 감독님 스타일의 엽기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요. 저와 가장 닮은 견우를 오랜만에 다시 보고 싶기도 하고요."
차태현은 어떤 역할이든 '차태현화(化)'하는 자신의 연기의 장단점을 명확히 안다. 장점은 자연스럽다는 것, 단점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의 연기는 그가 좋아한다는 송강호·하정우·류승범의 연기와는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비슷한 모습일지라도 늘 한결 같은 편안함으로 관객들 곁에 머무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차태현표 영화'를 관객들이 기다리는 이유다.
"'관객들은 차태현을 보러 가는 것보다 차태현표 영화를 보러 간다'는 말을 듣고 많이 공감했어요. 비슷한 캐릭터를 하는데도 관객들이 좋아해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 것 같고요. 제 영화를 보고 따뜻하거나 빤하지만 웃기도 하고 때로는 여운이 남는 걸 바라는 거겠죠."
사진/이완기(라운드테이블) 디자인/박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