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아버지는 한없이 큰 존재였다. 무슨 일이라도 다 해낼 것 같은 영웅 같았다. 그러나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을수록 아버지의 존재감은 서서히 작아지게 된다. 어릴 때는 알지 못한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아버지의 그 모습을 스스로 닮아가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해준 감독은 작고 사소한 아이디어에서 남다른 이야기를 풀어내는 재주가 있는 이야기꾼이다. '천하장사 마돈나'에서는 씨름과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재치 있게 엮어냈고, '김씨 표류기'에서는 자살을 꿈꾸는 남자와 히키코모리 여자의 색다른 로맨스로 따뜻한 감성을 전했다. 5년 만의 신작 '나의 독재자'는 김일성이 돼버린 아버지와 자본주의적인 욕망으로 가득한 아들의 이야기로 애증으로 뒤얽힌 부자 관계를 말하는 영화다.
영화는 남북정상회담 전에 실제와 같은 리허설을 치렀다는 실화에서 모티브를 빌려왔다. 전반부는 아들에게 멋진 연기를 보여주고 싶은 무명의 연극배우 성근(설경구)이 김일성의 대역이 돼가는 1972년의 이야기다. 군사 독재 정권 아래에서 그저 가족만을 생각하던 평범한 가장이 김일성과 같은 독재자로 변해가는 과정 속에 이해준 감독 특유의 유머와 감성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배우를 잡아먹는 배역"에 사로잡히는 성근의 변화는 연기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흥미로움을 전하기도 한다.
'나의 독재자'의 전반부는 가족이라는 테마는 물론 정치적·사회적 함의까지 담아냄으로써 풍성한 느낌이 있다. 반면에 1994년의 이야기를 그린 후반부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만 오롯이 집중함으로 인해 몰입도가 다소 떨어진다. 자신을 김일성이 믿는 늙은 성근과 자본주의적인 욕망에 충실한 태식(박해일)의 이야기가 기대만큼의 큰 충돌이나 갈등으로 다가오지 않는 점도 아쉬운 부분 중 하나다.
그럼에도 '나의 독재자'는 관객 마음에 한 가지 강한 인상만큼은 남긴다. 바로 배우들의 연기다. 두꺼운 분장을 하고서도 깊은 감정을 전하는 설경구, 그리고 그런 설경구를 묵묵히 바라보며 영화를 든든하게 짊어지고 가는 박해일의 연기는 '나의 독재자'의 가장 큰 미덕이다. 김일성의 대역이 있었다는 독특한 설정이 눈에 먼저 들어오겠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애증으로 뒤얽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익숙한 이야기가 공감대로 다가올 것이다. 15세 이상 관람가. 10월30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