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이 된 무명 연극배우 역할
전대미문 캐릭터, 아버지에 초점
특수분장 개의치 않고 감정 표현
지난 30일 개봉한 '나의 독재자'(감독 이해준)는 배우 설경구(46)가 왜 뛰어난 배우인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일생일대의 역할에 빠져들어 22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는 전대미문의 캐릭터로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나의 독재자'는 1972년 첫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일성의 대역이 존재한다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설경구가 맡은 김성근은 '리어왕'의 주인공 같은 역할을 아들 앞에 당당히 보여주고 싶은 무명의 연극배우다. 영화는 김일성의 대역이 된 김성근이 22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뒤에도 역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상황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깊은 애증을 그렸다.
설경구가 '나의 독재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특이한 소재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해준 감독에 대한 흥미 때문이었다. 1972년과 1994년 실제로 추진했던 김일성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로 엮어낸 시나리오를 보며 "한국에서만 할 수 있는 영화"라는 재미를 느꼈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정치적인 관점으로 바라봐서 무거운 느낌이 있었어요. 그런데 두 번째 읽을 때는 '이 인생 참 코미디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감독님도 이 이야기를 코미디로 풀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런 점들이 제 생각과 비슷했어요."
영화는 한국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여러 함의를 담고 있다. 또한 "배역에 잡아먹힌 배우"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배우의 삶도 함께 다루고 있다. 그러나 설경구가 김성근을 연기하면서 중점을 둔 것은 바로 '아버지'였다. 아들에게 '인생의 무대'를 보여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김성근을 이해했다.
"흔히 배역에서 '못 빠져나온다'는 표현을 하잖아요. 저는 김성근이 김일성 역으로부터 못 빠져 나온 게 아니라 안 빠져나왔다고 생각했어요. 언젠가는 마지막 무대가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죠. 영화를 보면 성근이 아들과 눈을 좀처럼 마주치지 않아요. 성근에게는 그것이 아들이 유일한 관객인 연극이었던 거예요."
난생 처음 노인 분장도 했다. 새벽부터 분장을 하느라 잠 한 숨도 못잔 채 연기를 해야 하는 쉽지 않은 촬영이었다. 배우는 얼굴의 세세한 근육의 움직임으로 크고 작은 감정을 전달한다. 그래서 자신의 피부를 감춰야 하는 특수분장은 연기의 장애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설경구는 늙은 성근의 감정을 관객에게 온전히 전하고자 과감히 감정을 표현했다.
"분장을 하면 아무래도 연기하는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조심스러움이 싫었어요. 조심하면 할수록 감정 표현이 잘 안 되니까요. 그래서 연기할 때는 분장이 찢어지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과감하게 표정을 지었어요. 분장팀이 촬영하는 동안 초긴장 상태였죠(웃음)."
'은교'에서 특수분장을 먼저 경험한 박해일의 배려도 많은 도움이 됐다. "제 마음을 가장 잘 알아준 건 해일이 밖에 없을 거예요. 감독님도 제 마음은 몰랐을 걸요(웃음). 분장 때문에 제가 나오는 장면을 먼저 촬영해야 했음에도 해일이는 자기 감정을 안 놓치고 제 연기를 받아줬어요. 다른 배우라면 자기 호흡을 다 가져간다고 분노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우러러 나온 배려에 감사했어요."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대통령과의 면담 장면은 유난히도 긴장됐던 순간이었다. 감정 표현에 대한 무게감이 컸기 때문이다. "감정을 잔잔하게 절제하면서 터트려야 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표현 수위를 모르겠더라고요. 게다가 정상회담을 연기하다 '리어왕'의 대사까지 하려니 어떻게 감정의 톤을 변화시켜야 할지 고민이었고요. 설명도 할 수 없는 답답함이죠. 그래서 감독에게 예민하게 굴었어요. 물론 나중에 술 한 잔 하면서 사과했지만요(웃음)."
'소원'에 이어 '나의 독재자'까지 설경구는 오랜만에 자신의 전공과목과 같은 긴 호흡의 연기를 보여줬다. 다음 작품인 '서부전선'에서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0년대로 돌아가 남한군 병사로 변신한다. 다시 예전처럼 블록버스터급 영화로 돌아가는 건지 궁금증이 생기지만 설경구는 "'나의 독재자'와는 또 다른 깊이가 있다. 뭔가 처절할 것 같은데 안 그런 영화"라며 말을 아꼈다. 분명한 것은 설경구의 연기는 단 한 번으로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 김성근과 달리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진/라운드테이블(한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