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된 이미지 벗고 일상적인 캐릭터 도전
노 메이크업에 파마까지 과감한 외모 변신
여성감독·배우 끈끈한 작업 "반갑고 소중해"
염정아(42)가 영화 '카트'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반가움과 의아함이 교차했다. '간첩' 이후 2년 만의 영화라는 점은 반가웠지만 그가 대형마트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연기한다는 사실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도도하고 세련된 이미지의 그가 생활의 때가 묻어 있는 노동자를 잘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이 있었다. 염정아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우려를 할 것이라는 걸 제가 우려했죠(웃음). 영화와 제가 잘 안 어울려서 작품을 망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정말 많이 했어요. 고민도 많았고요."
염정아가 '카트'를 선택한 것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시나리오에 대한 흥미 때문이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건축학개론' 등을 만든 제작사 명필름의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오래된 정원'으로 만났던 김우형 촬영감독과의 작업이라는 점은 영화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다른 작품들처럼 마음 끌리는 대로 작품을 선택했지만 막상 출연을 확정한 뒤에는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카트'에서 염정아가 맡은 선희는 대형마트의 계산원으로 일하며 고등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을 키우고 있는 평범한 엄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일상적인 인물을 보여주기 위해 염정아는 외모는 물론 감정적인 면에서도 많은 노력을 쏟았다.
"제가 기존에 갖고 있던 이미지 때문에 선희를 망치면 영화는 실패한다고 봤어요. 영화 속에서만큼은 염정아가 아닌 선희여야 했어요. 그래서 화장도 남자 배우들이 하는 정도로만 하고 머리도 짧은 머리에 아줌마 파마를 했죠. 큰 키도 늘씬한 느낌보다는 멀대같은 느낌으로 보이기를 바랐고요. 외적인 변화와 함께 선희의 심리 변화와 내면의 성장 과정을 최대한 자연스럽고 불편하지 않게 그리기 위해 매 장면 고민했어요."
영화는 부당해고를 당한 마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다. 회사가 시키는 대로 일만 하던 선희가 일련의 투쟁 과정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주체적인 노동자로 변화하는 과정이 영화의 중요한 드라마다. 선희를 만나면서 염정아는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에서는 작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평소와 다르게 여러 번 촬영을 반복할 정도로 연기에 집중했다.
염정아는 시나리오를 보면서 눈물이 흘렀던 장면들이 완성된 영화에서도 오랜 여운을 남겼다고 했다. 그 중 하나는 정규직이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가 하루 만에 해고 통보를 받은 선희가 아이들과 저녁을 먹다 조용히 눈물 흘리는 장면이다. "그냥 저 자신을 선희라고 생각했어요. 아침까지는 아이들에게 정규직이 된다고 이야기했는데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았으니 얼마나 막막할까 싶더라고요. 그러면서도 밥은 꾸역꾸역 먹잖아요. 초라함과 서러움에 길게 울었어요. 아이들에게 우는 소리가 들릴까봐 숨 죽여서 울었는데 그 모습은 김우형 촬영감독님이 잘 담아주셨어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아들 태영(도경수)이 편의점 주인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사람들 앞에서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하던 선희가 처음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영화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염정아는 "어떻게 표현할지 많이 생각했지만 결국 처음 자기 목소리를 내는 '떨림'을 선택했다"며 "작은 통쾌함을 줄 수 있는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보통 사람들처럼 노동자의 이야기는 뉴스로만 접했던 염정아는 '카트'를 통해 노동자들이 사실은 우리 옆에 가까이 있는 이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 이해를 통해 선희와 점점 가까워졌다. 영화 후반부, 회사를 향해 "사람 대접해달라"고 외치는 선희의 목소리는 캐릭터에 가장 녹아든 순간의 외침이었다.
"물대포를 맞으며 시위하는 장면은 촬영 전 겁이 났어요. 그런데 막상 촬영하니까 '투사'가 됐죠(웃음). 그 순간에는 어디에 부딪히는지도 다치는지도, 아픈지도 추운지도 모르고 촬영했어요. 그때는 우리 '동지들' 모두가 그랬기에 전쟁터나 다름없었어요."
여성 감독, 그리고 여배우들과 끈끈하게 작업한 '카트'는 염정아의 필모그래피에서 "반갑고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다. 차기작은 정하지 않았지만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하고 싶은 작품을 기다릴 생각이다. 다만 지금은 소중한 경험으로 남은 이 영화를 많은 관객들이 공감하길 바란다. 화려함을 벗고 뜨거운 동지애로 돌아온 염정아를 만날 때다.
사진/라운드테이블(한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