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 캐릭터
말투·행동 편하게…감정 표현 깊은 고민
"예술은 우연이 아닌 작업의 열매"
'상의원'은 조선시대 왕실의 의복을 만들었던 기관인 상의원을 무대로 한 사극영화다. 영화는 시대의 중요한 가치에 얽매인 채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양반이 될 수 있다는 꿈을 안고 법도와 규칙을 지키며 묵묵히 왕실의 옷을 만들어온 어침장 조돌석(한석규), 모든 권력을 다 가졌음에도 열등감을 지우지 못하는 왕(유연석), 그런 왕의 사랑을 단 한 번도 받지 못한 왕비(박신혜)까지 등장인물들은 각자 나름의 이유로 자유로움을 포기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그 속에서 유일하게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분방함을 표출하는 이가 있다. 배우 고수가 연기한 천재 디자이너 이공진이다.
"공진은 천재라기 보다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요. 자유로운 사람이요. 나머지 세 인물이 신분·권력·욕망 같은 걸 중요하게 여긴다면 공진은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는 이상적인 인물이죠. 물론 이건 제 생각이고 관객이 공진을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하지만요(웃음)."
고수가 지닌 반듯한 이미지는 그 동안 출연한 작품들의 영향이다. '고지전' '초능력자'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까지 고수는 다소 무겁고 어두운 캐릭터로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줬다. 밝은 분위기였던 '반창꼬'에서도 그는 극의 무게를 담당하는 역할로 깊이를 더했다.
그런 익숙한 모습의 고수를 떠올린다면 '상의원' 속 공진은 의외의 변신이다. 조선시대의 절대적인 가치인 신분과 예의에 얽매이지 않고 늘 온화한 웃음을 짓는 공진을 보다보면 고수에게도 이런 부드럽고 편안한 모습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영화는 이토록 자유로운 공진이 조돌석과 왕과 만나면서 빚어지는 충돌과 균열, 그리고 왕비를 향한 사랑으로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다른 인물들이 전형적인 사극 캐릭터라면 공진은 현대적인 표현도 과감히 쓰는, 마치 미래에서 온 것 같은 인물이다. 첫 사극 도전이었음에도 고수는 다른 사극보다 말투나 행동 등에서 조금 더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캐릭터가 지닌 특수성 때문이다.
그러나 감정의 표현은 여느 작품들처럼 쉽지 않았다. 늘 허허실실 웃음을 잃지 않는 공진의 감정을 표현하는 건 '액션과 리액션'으로 이뤄지는 기존의 연기 방식과는 달라야 했다. 특히 왕비를 향한 마음은 관객에게도 최대한 들키지 않기를 바랐다. 공진이 왕비의 치수를 직접 재는 장면이 특히 그러했다.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장면이잖아요. 왕비를 '사모하는' 공진의 마음이 최대한 들키지 않기를 바랐어요. 들뜬 숨도 쉬지 않고 마지막에 아쉬움을 담은 눈빛을 보여주는 정도로 연기했어요. 사실 공진을 향한 왕비의 마음은 무엇인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왕비를 향한 공진의 마음은 사랑을 넘어선 사모의 감정이라 생각하며 연기했어요."
영화 후반부, 감옥에 갇힌 공진이 자신을 찾아온 조돌석의 손을 붙잡고 속마음을 드러내는 장면은 아직까지도 깊은 고민으로 남아있다. "그 한 마디를 하지 않았다면 공진이 조금 더 이상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을까 싶기는 해요. 하지만 100% 완벽하게 이상적인 인물은 없잖아요. 지금도 사실은 정답을 잘 모르겠어요(웃음)." 캐릭터에 대한 이 깊이 있는 고민은 고수가 연기에 얼마나 열정적인 배우인지를 잘 보여준다.
예술은 타고난 재능도 중요하지만 꾸준한 연습도 필요하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고수는 "예전에는 우연을 바랐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많은 훈련과 노력을 통해 좋은 연기자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배우는 감정과 무의식을 다루는 쉽지 않은 직업이지만 그럼에도 노력한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술은 우연이 아닌 작업의 열매"라는 그의 말에는 고수의 연기철학이 그대로 녹아있다.
올해로 고수는 데뷔 15년을 맞았다. 그는 "아직은 정리하는 시기가 아닌, 늘 도전하고 변화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며 "매 작품 나름대로의 시도를 한 것처럼 앞으로 또 다른 도전을 하게 될 것"이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새해 계획도 거창하지 않다. "'상의원'이 잘 돼 새해까지 쭉쭉 잘 나갔으면 좋겠다"는 말은 단지 영화 홍보를 위한 빈말이 아닌 진심이 단긴 표현이다.
"자기 것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잖아요. 저도 이제 슬슬 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어요. 한 시도 머무르지 않는 게 사람이라는데 그런 사람이 발전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응원하는 것도 의미 있죠. 저도 또 다른 좋은 작품으로 돌아올 테니 응원해주세요(웃음)."
사진/김민주(라운드테이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