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은 죽었지만 400GB 증거가 남았다
국정원 직원 임모(45)씨가 남긴 유서 3장 중 국정원에 남긴 1장이 19일 공개됐다. 나머지 2장은 가족과 부모에게 남긴 유서로 유족들의 반대로 공개되지 않았다.
[메트로신문 송병형기자] 국가정보원의 민간 사찰 의혹을 규명할 핵심증인인 국정원 사이버안보 전문가가 자살했다. 하지만 의혹을 규명하기에 충분할 것으로 보이는 400기가바이트(GB)라는 막대한 분량의 증거가 남아 있다. 국정원이 해킹프로그램을 구매한 이탈리아 해킹팀사에서 유출된 자료다. 해외에서 '역대 가장 투명한 (사찰) 보고서'라는 평가까지 나오는 유출자료다. 유병언 씨의 죽음을 시작으로 핵심증인의 죽음으로 인해 진상규명의 길이 막힌 최경락·성완종 씨의 자살과는 다른 점이다.
실제 언론에서 유출자료를 분석해 민간 사찰에 대한 증거를 속속 내놓는 가운데 야당에서는 해킹을 위해 국정원이 138개의 IP를 할당했고, 여기에는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카톡을 운영하는 다음카카오도 있었다는 의혹을 추가로 제기했다. 민간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다는 자살한 국정원 직원의 유언과는 상반된 내용이다.
19일 경찰은 전날 자신의 자동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워 자살한 국정원 직원 임모(45)씨의 유서 3장 중 국정원에 보낸 유서 1장을 공개했다. 유서에서 임씨는 "지나친 업무에 대한 욕심이 오늘의 사태를 일으킨 듯하다. 내국인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외부에 대한 파장보다 국정원의 위상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혹시나 대테러·대북 공작활동에, 오해를 일으킬, 지원했던 자료를 삭제하였다. 저의 부족한 판단이 저지른 실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러나 이를 포함해서 모든 저의 행위는 우려하실 부분이 전혀 없다"며 "저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잘 조치해주시기 바란다"고 했다.
그의 유서에서 자살의 이유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동료와 국민들께 큰 논란이 되게 되어 죄송하다"고만 했을 뿐이다.
국회 정보위원회 여당 간사인 이철우 새누리당 의원은 유서 공개 직후 임씨에 대해 "20년간 사이버안보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며 "문제가 된 프로그램을 본인이 직접 구입하고 사용한 직원으로 직원들간에 신망이 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산 등을 담당하던 착한 직원인데 이런 문제가 불거지고, 왜 구입했느냐 감찰도 들어오고, 정치 문제화되니까 압박을 느낀 것 같다"고 자살 이유를 추정했다.
야당 간사인 신경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만약 국내 해킹이나 사찰을 안 했다면 소명만 하면 될 것이고 오히려 국가로부터 훈장 포상을 받을 직원일 것"이라며 "그렇게 하지 않고 죽음을 택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고, 무고한데 왜 죽었는지 진실규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해킹 의혹 조사를 맡은 안철수 새정치연합 국민정보지키기 위원장 역시 "국정원의 사찰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관련 직원의 돌연한 죽음은 또다른 의혹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며 "고인이 죽음에 이른 이유에 대한 규명없이 국민 의혹은 해소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일단 임씨가 삭제한 자료는 디지털 포렌식을 통해 100% 복구가 가능하다는 게 국정원의 설명이다. 그러면서 국정원은 민간 사찰 의혹을 계속해 전면 부인하고 있다. 이날 새정치연합이 제기한 의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부인했다.
새정치연합은 유서 공개 직후 "해킹팀의 유출자료를 분석한 결과 발견한 로그파일에서 한국 인터넷 IP 주소 138개를 확인했다. 중복 건수를 포함하면 300건"이라며 "할당 기관은 KT, 서울대, 한국방송공사 같은 공공기관이고, 다음카카오 같은 일반기업도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취약점이 있다는 걸 보고 여러 사이트를 검색한 로그(기록) 아닐까 한다. 취약점이 발견됐는데 그냥 지나치겠나. 그 이후 행동이 있었을 거라 추정할 수 있다"며 민간 사찰 의혹을 제기했다.
국정원은 즉각 "새정치연합이 참고했다는 해킹팀의 유출 로그파일은 디도스 공격 등 외부 해킹 시도를 차단하기 위해 해킹팀 자체 방화벽의 로그 파일로 추정된다"고 의혹을 부인했다.
국정원의 해킹 의혹은 민간 사찰과 선거 사찰의 실제 여부, 동시에 대규모 사찰이냐가 쟁점으로 꼽힌다. 국정원은 20개 회선만으로 대규모 사찰이 불가능하고, 대테러·대북 활동에만 사용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추가 회선 구매에 대한 증거와 민간 사찰에 대한 증거가 계속 나오는 상황이다. 모두 유출된 해킹팀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물이다. 400GB라는 방대한 자료는 아직 분석이 진행 중으로 일부분만이 드러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