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신문 장병호 기자] 시작은 '도둑들'이었다. 스타의 이미지가 강했던 전지현(33)은 '도둑들'의 예니콜을 통해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대중에게 다시금 각인시켰다. 발랄하면서도 솔직한 예니콜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한 전지현의 매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배우로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회였다.
전지현은 곧바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베를린'에서는 예니콜과 정반대의 성격인 련정희를 연기했다. 우수에 가득 찬 눈빛에는 그동안 보여준 적 없었던 깊은 감정이 있었다. 그리고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찾아왔다. 전지현의 연기 인생이 새로운 정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전지현의 행보는 쉼 없이 이어졌다. '별에서 온 그대' 이전에 출연을 이미 결심했던 '암살'이었다. '도둑들'의 최동훈 감독과 다시 만난 작품으로 1933년 상하이와 경성을 배경으로 한 친일파 암살 작전을 그리고 있다. 최동훈 감독은 일찌감치 전지현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 전지현으로서는 작품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최동훈 감독님의 다음 작품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결심이 있었어요. 감독님으로부터 '암살'의 초안을 들었을 때도 무조건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시나리오를 받은 뒤에는 조금 놀랐어요. 제가 맡은 캐릭터의 비중이 커서 놀랐고, 최동훈 감독님의 전작과는 다른 느낌에 또 한 번 놀랐죠."
'암살'에서 전지현은 독립군 저격수인 안옥윤을 연기했다. 속사포(조진웅), 황덕삼(최덕문)을 이끄는 대장이다. 그러나 안옥윤은 친일파 암살 작전을 위해 경성에 왔다 그동안 알지 못한 비밀을 발견하고 혼란에 빠진다. 영화의 중심에는 "커피도 마시고 연애도 하고 싶은" 평범한 꿈을 지닌 안옥윤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겪는 갈등이 있다.
한국영화에서 흔치 않은 여성 캐릭터 중심의 작품이다. 여배우라면 누구나 탐이 날 수밖에 없다. 전지현은 "자랑스러웠고 기분이 좋았던 것이 사실"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러나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된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역할을 위해 고민하고 연구해야 할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지현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역사적 격동기인 1930년대를 살았던 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안옥윤의 임무를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녀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100회차 촬영인데 안옥윤이 나오는 장면이 80회차나 돼요. 그래서 오히려 안옥윤의 사연을 숨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이런 사연이 있어'라고 드러내놓고 연기하면 보는 사람이 숨 막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관객에게는 편안하게 다가가고 싶었어요."
영화 속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안옥윤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친일파를 상대로 총격전을 벌이는 신이다. 전지현도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장면이다. "여성성이 부각되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피가 낭자한 총격전을 벌이죠. 이것만큼 쿨한 게 어디 있을까 싶었어요. 잘 해내고 싶었고요. 냉정하게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안옥윤의 마음이 총을 쏘는 행동에서 그대로 느껴지길 바랐죠." 이 한 장면만으로도 '암살'은 전지현의 영화가 되기에 충분하다.
'도둑들'을 시작으로 '암살'에 이르는 전지현의 행보를 보면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바로 편안함이다. 결혼 이후 오히려 더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모습에서는 예전과 같은 신비주의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전지현 스스로도 느끼는 변화이기도 하다.
전지현은 "살면서 집중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는데 연기할 때만큼은 배고픈 것도 아픈 것도 까먹고 집중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 집중력이 연기를 더욱 재미있고 편안하게 만든다고도 했다. 처음 배우 일을 시작했을 때는 "나는 다르다"는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그러나 지금은 "카메라 앞에서만 특별하면 되지 평소에도 특별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여전히 전지현의 미래가 궁금한 이유다.
"저에게는 제 인생이 먼저에요. 그런데 지금 제 삶을 보면 배우로 산 세월이 더 길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연기를 때놓고 생각할 수 없어요. 배우라는 삶을 살아온, 지울 수 없는 제가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앞으로도 배우로 살아야 할 것 같아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