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덕혜옹주'는 김장한(박해일)의 뒷모습으로 시작한다. 희끗한 머리와 거동이 불편한 다리가 세월의 흔적을 짐작케 한다. 카메라는 마치 김장한의 그림자가 된 것처럼 그의 뒷모습을 한동안 따라간다. 덕혜옹주의 곁을 묵묵히 지켰던 김장한처럼 말이다. 이 아련하면서도 애잔한 감정은 '덕혜옹주'가 어떤 정서의 영화인지를 잘 보여준다.
덕혜옹주는 고종황제의 외동딸로 1912년에 태어났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였던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비운의 삶을 살았던 인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일제에 의해 조선을 떠나야 했던 덕혜옹주는 해방 이후에도 조선 왕조를 거부한 이승만 대통령 때문에 고향 땅을 한동안 밟지 못했다. 1962년이 돼서야 가까스로 귀국해 여생을 보내다 1989년 세상을 떠났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덕혜옹주의 이야기가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2009년 권비영 작가의 소설 '덕혜옹주'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부터다. 영화 '덕혜옹주'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덕혜옹주의 삶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한다. 연출을 맡은 허진호 감독은 노년이 된 김장한이 실종된 덕혜옹주(손예진)를 찾아나서는 이야기 구성을 통해 덕혜옹주의 생애를 찬찬히 그려나간다.
영화의 초반부는 덕혜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덕혜가 어떤 인물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영화는 덕혜옹주를 '대한제국의 황녀'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지닌 인물로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인간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 인물로 그린다. 덕혜옹주에게 중요한 것은 가족이다.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받았고, 어머니를 지극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그렇다. 아이들을 생각하며 동요를 만드는 것에서는 덕혜가 지닌 인도주의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덕혜옹주'의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민족주의 정서에만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인간적인 가치를 기반으로 보다 보편적인 공감대를 만들어내는데 초점을 맞춘다. 내선일체를 위해 기모노를 입으라는 일제의 요구를 덕혜가 거부하는 장면이 단지 민족적인 반항이 아닌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선택처럼 다가오는 이유다. 그렇게 덕혜를 인간적인 캐릭터로 그려냄으로써 영화는 보다 여운이 깊은 감정을 관객에게 전한다.
허진호 감독은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감정이 지닌 세세한 결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는데 뛰어난 힘을 지닌 연출자다. 그가 만든 멜로영화가 여타의 작품들과 달리 마음에 오랜 여운을 남겼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덕혜옹주'에서도 허진호 감독의 섬세한 연출은 여전하다. 남녀 관계가 아닌 보다 다양한 인간관계로 그 감정의 폭이 넓어졌을 뿐이다. 충분히 신파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최대한 절제된 감정으로 담아냈다는 것, 그것이 '덕혜옹주'가 지닌 가장 큰 힘이다.
'덕혜옹주'는 민족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대와 맞섰던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김장한의 뒷모습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김장한과 덕혜옹주의 뒷모습으로 막을 내린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본다는 것, 그 속에는 사랑, 그리움, 애틋함과 같은 모든 감정이 담겨 있다. 가장 인간적인 가치다. 12세 이상 관람가. 8월 3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