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없는 삶처럼 비극적인 게 어디 있을까. 고종의 외동딸인 덕혜옹주의 삶이 그렇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갖고 있지만 덕혜옹주는 시대의 강요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역사에도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비운의 인물이다.
'덕혜옹주'는 손예진(34)에게 남다른 영화다. 개봉을 하루 앞둔 지난 2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이전에도 개봉이 다가오면 '영화가 잘 되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덕혜옹주'는 보다 경건해지는 마음이 있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촬영을 마친 뒤 잊었다고 생각한 덕혜옹주의 마음이 개봉을 준비하면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만큼 덕혜옹주에 대한 애착이 컸다.
"덕혜옹주는 실존 인물이잖아요. 제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인물이라 사명감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정말 잘 표현해서 많은 분들이 덕혜옹주의 넋을 기려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한번쯤 덕혜옹주를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랄까요? 영화가 담고 있는 것도 엄청난 교훈이 아닌 우리 인생과 세월에 대한 이야기죠. 개인적으로 생각을 많이 한 작품이었어요."
손예진은 '덕혜옹주' 속 덕혜를 "대단하지 않기에 애정과 연민이 더 가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수동적인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이야기"라는 점에 많이 공감했다. 권비영 작가의 원작 소설을 통해 덕혜옹주의 삶을 알고는 있었다. 출연을 결심한 것은 허진호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에서였다. '외출' 이후 10년여 만의 재회다.
"감독님이 '덕혜옹주'를 영화화한다는 걸 기사로 접했어요. '무언가 안 어울리면서도 신선하다'는 느낌이었죠(웃음). 여배우로서는 한 여자의 일대기를 그린 이야기라 흥미로웠죠. 그런데 허진호 감독님이 '한 번 보자'고 하시더라고요. 운명 같은 작품이었어요. '외출'은 지금도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그때 정말 어린 나이였는데도 감독님이 저를 많이 존중해주셨거든요. 그런 감독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더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영화는 덕혜옹주의 비극적인 삶과 함께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킨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손예진의 말대로 영화 속 덕혜옹주는 이야기를 주도하기보다 주변 사람들에 의해 사건에 휘말리는 수동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덕혜옹주의 아련하고 애잔한 모습이 가슴에 더욱 깊이 남는다. 관객과 공감하고자 하는 손예진의 연기, 그리고 인물의 감정을 절제된 시선으로 담아낸 허진호 감독의 연출이 빚어낸 결과다.
"큰 감정의 덩어리들로 이뤄진 신들이 많았어요. 덕혜의 모든 인생에 깊이 들어갈 수는 없었죠. 큰 사건들을 순서대로 보여주는 식이다 보니 관객들이 이를 너무 과장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의 연출 방식 때문에 그렇지 않게 담긴 것 같아요. 배우 입장에서는 클로즈업으로 길게 찍는 게 연기적으로는 더 많은 걸 보여줄 수 있죠. 하지만 감독님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슬픔이 보이는 방식으로 연출을 하세요. 그리고 편집을 통해 감정이 더 절제되기도 했고요. 물론 현장에서는 감정을 더 끌어올려 연기한 순간이 많았지만요(웃음)."
전작 '비밀은 없다'가 관객과의 공감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감정을 표현한 작품이라면 '덕혜옹주'는 정반대로 관객과의 공감에 오롯이 마음을 쏟아부은 작품이다. 영화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덕혜옹주의 귀국 장면에서는 실제 덕혜옹주가 느꼈을 감정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하고 싶었다. 손예진이 이번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연기한 장면 중 하나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다큐멘터리를 찾아봤다. 덕혜옹주가 귀국하는 장면을 보는데 너무 슬프더라고요. 동공에 초점이 없어보였어요. 보통 치매에 걸린 노인도 시선은 어딘가를 향하는데 덕혜옹주는 텅 빈 느낌이었죠. 그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슬픔도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을요. 촬영할 때는 현장이 정말 진짜 같은 분위기에 젖었어요. 같이 연기한 라미란 언니도 엄청 울었고요."
개봉을 앞두고 영화가 역사를 왜곡하고 미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손예진은 "인생이나 인간, 그리고 역사는 단 하나의 시점만으로 바라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우리 영화는 수동적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자의 비극적인 일생을 담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영화를 보시면 역사 왜곡으로 보이지 않을 거예요. 덕혜옹주가 하지 않았던 독립운동 이야기를 그린 것도 아니고요. 최소한의 기본적인 진실성은 가져가려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손예진이 바라는 것은 많은 이들이 영화에 공감해주는 것이다.
"덕혜옹주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라는 타이틀이 있지만 위대한 인물은 아니었어요. 다만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가련한 여인이었죠. 그래서 그녀의 감동과 아픔에 더 공감할 수 있었고요. 개인적으로 영화가 잘 됐으면 해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을 뛰어넘는 제 최고의 흥행작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