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에게 '터널'(감독 김성훈)은 어떤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팽목항 앞바다에서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고다. 물론 이것은 우연의 일치다. '터널'의 원작 소설은 세월호 사고 이전에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시점에 쓰인 두 작품이 비슷한 지점을 공유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재난의 원인과 이에 대한 대처 방법이 영화와 현실에서 똑같이 그려진다는 점에서 '터널'은 한국 사회를 잘 반영한 작품이다. '터널'을 보는 것은 마음이 아프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슬픈 진실을 다시 한 번 목도하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평범한 직장인이자 가장인 정수(하정우)가 갑자기 무너져내린 터널 밑에 깔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정수가 119에 구조 요청을 하면서 사고 소식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 500㎖ 생수 2개와 딸을 위해 산 생크림 케이크만으로 연명해야 하는 정수는 하루라도 빨리 구조대가 자신을 찾길 바란다. 그러나 터널 바깥의 세상은 정수에게 관심이 없다. 그곳에 있는 이들에게는 정수의 생명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한 축은 터널에 갇힌 정수의 이야기가 담당한다. 붕괴된 터널 안에서 오갈 데 없는 정수의 상황은 그야말로 절망적이다. 안정을 잃은 채 흥분하는 정수는 구조대장 대경(오달수)과 아내 세현(배두나)과 통화를 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아간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정수의 낙관적인 모습은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영화에 작은 생기를 더한다. 정수가 터널 안에서 겪게 되는 뜻하지 않은 사건도 밋밋해질 수 있는 영화를 한층 흥미롭게 만든다.
그러나 '터널'에서 보다 눈이 가는 것은 영화의 또 다른 축인 터널 밖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는 정수의 구조를 둘러싼 정부와 언론, 그리고 시민들의 태도를 보여주는데도 초점을 맞춘다. 정부와 언론은 정수의 구조에 관심이 없다. 이 사고가 대중들에게 어떻게 보일지가 더 중요하다. 사진 찍기에 급급한 관료들, 그리고 취재 윤리도 어긴 채 어떻게든 화젯거리만 찾는 기자들의 모습은 우리가 뉴스에서 봐오던 익숙한 모습이다. 사고로 재개발이 중단된 지역 주민들은 경제 논리를 앞세우며 개발을 재개하라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정수는 사람이 아닌 재개발을 막는 '도롱뇽'과도 같다. 이들 가운데에서 "정수가 살아 있으면 어떻게 할 거냐"는 세현의 한 마디가 가슴을 아프게 파고든다.
2014년 4월 15일에 이 영화를 봤다면 아마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생각으로 영화를 봤을 것이다. 그러나 2014년 4월 16일 그날의 그 사고를 두 눈으로 지켜본 우리에게 '터널'은 너무나도 있을 법한 이야기로 다가온다. 그래서 관객은 영화 시작과 동시에 양손을 움켜쥐고 정수의 생환을 바라게 된다. 이 깊은 몰입도만으로도 '터널'은 영화적인 재미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도 '터널'의 미덕은 잘 만들어진 재난영화라는 것이다. 영화는 적절한 완급력으로 재난 상황을 그려가며 기승전결이 뚜렷한 이야기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절망과 희망, 그리도 또 다른 좌절 속에서 다시 희망을 향해가는 여정이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관객에게 제시된다. 다만 아쉬운 것은 너무 급작스러운 듯한 결말이다. 어딘가 미진하게 느껴지는 이 결말은 그러나 그 자체로 현실의 또 다른 반영일 것이다. 12세 이상 관람가. 8월 10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