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의 개봉을 앞두고 인터뷰에서 만난 배우 손예진은 "허진호 감독님이 '덕혜옹주'를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기사로 접했다. 무언가 안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신선했다"고 말했다. 그 말처럼 허진호(53) 감독이 덕혜옹주의 삶을 스크린으로 옮긴다는 소식은 호기심을 먼저 갖게 했다. 그동안 일상적인 분위기의 멜로영화를 주로 만든 허진호 감독과 제작비 규모가 큰 시대극의 만남은 그 자체로 신선했기 때문이다.
허진호 감독이 덕혜옹주의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부터다. 1962년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한 덕혜옹주의 모습을 본 뒤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덕혜옹주의 귀국하는 장면을 인상 깊게 봤어요. 어린 나이에 일본에 가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덕혜옹주의 이야기만 있었다면 영화를 안 만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귀국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봤는데 눈물이 나면서 감동이 있었요. 비극이 해소되는 지점이 있었죠. 비극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지키려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였어요."
물론 덕혜옹주의 삶을 영화화하는 작업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덕혜옹주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았다. 극적인 드라마도 없는데다 여자 주인공이라는 점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주변에서는 위인도 아니고 독립운동가도 아닌 덕혜옹주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가치가 있느냐는 반응도 보였다. 그때 마침 권비영 작가의 소설 '덕혜옹주'가 출간됐다. 고민의 실마리가 소설 속에 있었다.
"김장한이라는 인물로 이야기를 풀었다는 점, 그리고 덕혜의 내면이 잘 다뤄져 있다는 점에서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다가 책이 많이 팔렸잖아요. 이 정도면 해볼 만한 것 같다고 주위에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됐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를 준비하게 됐어요."
실제 역사를 영화로 옮겨야 하는 만큼 사전 준비도 철저하게 했다. 최대한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면서 개연성과 정당성을 가져가고자 했다. 극중 박해일이 연기한 김장한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왔다는 설정은 당시 일본 육사를 졸업했던 이우 왕자와 함께 일본에 왔다고 설정해 개연성을 더했다. 영친왕을 사랑하는 아내 때문에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답답한 인물로 만든 것도 당시의 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결과물이었다.
손예진이 맡은 덕혜옹주 캐릭터 또한 최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고자 했다. "역사를 영화화한다는 부담이 있었어요. 아무래도 극화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덕혜옹주는 굉장히 근대의 인물이잖아요. 1989년에 돌아가셨는데 알려진 게 없어요. 그럼에도 이 인물을 극화시키는 데 있어 정당성과 개연성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영화 '덕혜옹주' 촬영장 모습./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속 덕혜옹주가 일본에 강제 징용된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도 고민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아마도 실제 덕혜옹주는 이런 일을 못했을 것 같아요. 일제에 이용만 당했을 거예요. 그래서 원래는 그냥 친일 연설을 하는 정도로 설정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덕혜옹주에게 (극적인) 무언가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너무 수동적으로 보였고요. 그래서 연설 장면 정도는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장면을 만들었어요."
누군가는 '덕혜옹주'에 대해 허진호 감독의 색깔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전작들과 비교하면 스케일이 큰데다 허진호 감독 영화에서 보기 힘든 액션 신 등이 곳곳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허진호 감독은 전작들과 다른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작품에 임하지 않았다. 그동안 만들어온 멜로영화처럼 '덕혜옹주'에서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 또한 인물들 사이의 감정이었다.
"공항에서의 귀국 장면이 없었다면 '덕혜옹주'를 만들지 않았을 것 같아요. 사실 그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세월이 지난 다음에 다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요. 제 영화를 보면 항상 인물들이 다시 만나는 장면이 있어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다시 만나는 건 아니지만 다시 돌아가는 장면이 있죠. '봄날은 간다' '외출' '행복'에서는 인물들이 다시 만났고요. 그래서 오랜 세월을 가지고 다시 만나는 감정을 그리는 영화를 준비한 적도 있어요. '덕혜옹주' 또한 시대보다 사람을 이야기하고 싶어 선택한 것이고요."
영화를 보고 나면 유독 인물들의 뒷모습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나이 든 장한의 뒷모습으로 시작한 영화는 긴 시간을 거쳐 다시 만난 장한과 덕혜옹주의 뒷모습으로 마무리된다. 허진호 감독은 "찍다 보니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첫 장면은 시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마지막 장면은 내레이션이 있어서 영화가 조금 더 끝나는 느낌으로 그렇게 찍었고요. 특별한 의도는 없었어요(웃음)." 그러나 영화는 이 같은 인물들의 뒷모습을 통해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덕혜옹주의 삶을 찬찬히 따라가게 만든다. 늘 한 걸음 뒤에서 인물들의 마음까지 바라보고자 했던 허진호 감독 특유의 시선이 그대로 느껴지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허진호 감독은 "요즘 고민 중의 하나는 옛날의 내가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인가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누군가는 허진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며 그가 점점 변하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속에서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덕혜옹주'가 잘 보여준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에 여전히 기대를 갖게 되는 이유다. '덕혜옹주'를 마친 허진호 감독은 이제 다음 작품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차기작은 다양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좀 더 장르적인 영화를 해볼까 싶어요. 조금 더 빨리 작업을 할 수 있다면 일상적인 멜로도 하고 싶고요. 한 번은 규모가 큰 장르영화를, 또 한 번은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같은 영화를 작업하는 것이죠. 하지만 문제는 게으름이에요. 감독들은 다 게으르거든요(웃음). 몇 년 동안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게 지겹기는 해요. 하지만 여전히 재미있는 작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