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승원(46)은 "무언가를 이루려고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집착해서 애쓴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깨닫는 나이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한때는 먼 미래의 목표를 향해 부단하게 달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오늘의 현재에 집중하면서 하루하루를 잘 살고자 한다는 뜻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차승원이 보여준 '편안함'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 편안함은 7일 개봉한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감독 강우석)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다.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조선 후기 지도에 모든 걸 바쳤던 고산자 김정호의 삶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작가 박범신의 소설 '고산자'를 원작으로 지도를 둘러싼 권력의 암투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열정을 지키고자 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동안 강우석 감독과 제작자와 배우로 만났던 차승원은 이번 작품으로 처음 '감독' 강우석과 함께 작업했다.
"처음 감독님이 작품 제안을 했을 때는 의아했어요. '왜?'라는 생각이 들었죠(웃음). 감독님이 친한 배우들도 있는데 왜 굳이 이 대본을, 그것도 이 역할로 나에게 주신 건지 궁금했죠. 물론 감독님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작업을 해보니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번 작품으로 감독님을 더 잘 알게 됐고요. '감독'으로서의 강우석은 완벽하게 휴머니스트거든요."
차승원이 사극에서 실존 인물을 연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최근 작품인 드라마 '화정'에서도 그는 광해군을 연기한 바 있다. 그러나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화정'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인물에 접근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김정호에 대해 남겨진 자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조금 더 편안하게 인물을 표현할 수 있었다. 차승원이 김정호를 연기하는 것에 마음이 끌린 이유다.
시나리오를 통해 처음 접한 김정호의 이미지는 "답답한 인물"이었다. 지도에 모든 것을 건 외곬 같은 모습 때문이었다. 그러나 차승원은 김정호를 그런 인물로 그리고 싶지 않았다. "위인이 너무 위인처럼 보이면 이상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외곬의 모습을 많이 헐려고 했어요. 영화 초반에 딸을 보고도 '어디서 많이 본 처자 같다'고 말하는 장면처럼요.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캐릭터에 대해 많은 부분을 조율해갔어요."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CJ엔터테인먼트
지도를 만든 이의 이야기인 만큼 영화는 제주도부터 백두산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로케이션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마치 CG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 풍광 속에서 묵묵히 길을 걸어가는 김정호의 모습이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차승원에게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특별하게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자연스럽게 자연의 일부가 되려고 했죠. 그리고 그런 곳에 가면 저절로 무언가를 하지 않게끔 돼요. 그래서 공간이 주는 느낌을 자연스럽게 받아서 표현하고자 했어요."
그래서일까. 이번 영화에서는 유독 차승원의 연기가 편안하게 다가온다. 영화 후반부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조차도 과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계산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 그것이 이번 영화에서 차승원이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었다.
"'최고의 사랑'처럼 계산해서 연기를 해야 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이번 영화는 그렇게 계산해서 연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게 맞는 거라고 봐요. 촬영 전날 '어떤 연기를 해야겠다'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사실은 아무 쓸모가 없어요.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도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정해놓고 가는 게 아니라 '다음에 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죠. 그렇게 연기하는 게 제일 좋은 게 아닐까 싶어요."
김정호에게는 '지도'라는 거창한 목표가 있다. 차승원 또한 삶의 목표가 있다. 그러나 김정호처럼 거창한 것은 아니다. 식구들이 별일 없이 건강하게 오랫동안 함께 하는 것, 누구나 꿈꾸는 그런 평범하지만 소박한 행복을 차승원 또한 바라고 있다.
"물론 일할 때의 만족감이나 희열, 성취감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의 방향이 어디일지를 생각해보면 나보다는 내 식솔들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건 기본이에요. 그러나 저는 연기보다는 나의 일상적인 삶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식구들이 아무 탈 없이 건강한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니까요. 그러다 좋은 작품을 만나면 배우로서 스포트라이트도 받게 되겠죠.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그런 과정의 하나에요. 인생의 역작이 아닌, 삶의 과정에 있는 여러 의미 있는 지점 중 하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