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배우라고 꼭 주인공의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연기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윤여정(69)의 필모그래피가 이를 잘 보여준다. 스크린에 윤여정이 등장할 때, 우리는 평범한 할머니가 아닌 윤여정만의 색깔이 녹아든 캐릭터를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윤여정은 영화를 통해 노년의 삶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증명해보이고 있다.
6일 개봉하는 '죽여주는 여자'(감독 이재용)는 윤여정이 아니었다면 좀처럼 완성되기 힘들었을 작품이다. 영화는 탑골공원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성(性)을 파는 일명 '박카스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린다. 파격적인 소재지만 영화는 자극적이기보다 따뜻하다. '스캔들: 남녀상열지사' '여배우들' '두근두근 내 인생' 등 이재용 감독의 전작들을 떠올리면 파격과는 거리가 먼 영화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여배우들'로 이재용 감독과 인연을 맺은 윤여정 또한 이재용 감독이 영화를 자극적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 역할을 자신이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재용 감독이 어떤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쓰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어요. 완성된 시나리오를 보냈기에 '누가 한다고 했지?'라고 물었죠. 그랬더니 이재용 감독이 '선생님이 하시라고 보냈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이재용 감독이 극단적으로 영화를 만들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거든요. 그래서 타이밍에 맞춰 출연하기로 결정했어요."
영화 속에서 윤여정이 연기하는 소영은 한국의 슬픈 현대사를 홀로 겪어낸 기구한 여성이다. 한국전쟁 당시 고아가 된 뒤 미군기지 근처에서 양공주로 살아온 그녀는 노인이 된 지금 박카스 한 병과 함께 성(性)을 팔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이어간다. 세상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약자 중에서도 약자지만 소영은 그런 자신보다도 더 약한 이들을 보듬을 줄 안다. 노인, 트랜스젠더, 장애인, 그리고 혼혈아까지 영화는 소수자들의 연대를 통해 따뜻함을 전한다.
윤여정은 이번에도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내가 이 여자라면"이라는 생각으로 소영에게 다가갔다. 그 과정에서 이해한 것은 소영이 "죄의식을 평생 못 내려놓을 짐처럼 안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소영이 미군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입양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저는 그때 소영이 스스로를 죽은 걸로 생각했을 거라고 봐요. 자기 새끼를 키우지 못하고 남에게 보내는 심정은 엄마로는 평생 잊지 못할 짐이거든요." 소영을 단순한 '박카스 할머니'를 넘어 나름의 사연이 있는 인물로 그리는 것, 그것이 이번 작품에서 윤여정이 가장 신경 쓴 부분이었다.
물론 그 과정은 수월하지 않았다. 탑골공원 근처의 허름한 여관에서 성매매를 하는 장면을 찍을 때는 도저히 익숙해지기 힘든 현장 분위기 때문에 반복되는 촬영을 중단하기도 했다. 이전까지는 작품이 끝나면 캐릭터에서 늘 쉽게 빠져나왔지만 이번에는 캐릭터의 무게감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2개월 남짓한 촬영을 마친 뒤에는 깊은 우울감을 느꼈다.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영화를 찍는) 2개월도 이렇게 힘든데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뭘까 싶었죠. 인생이 불공정하고 불공평하다는 것은 잘 알아요. 그래도 이 할머니들도 언젠가는 나처럼 누군가의 소중한 딸로 태어나 부모의 축복을 받았을 거 아니에요. 영화 마지막에 그런 장면이 나오죠. 다 속사정이 있을 거라고요. 다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점점 우울증에 빠졌어요."
노인의 성, 그리고 사회에서 외면 받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그리던 영화는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죽음이라는 테마를 꺼내다. 힘든 삶 속에서 죽음마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노인의 현실을 다룬다. 소영은 아픈 몸으로 살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한 노인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어느 새 진짜로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
"이재용 감독과 함께 고민이 많았어요. 누군가를를 죽인다는 것은 결국 살인이잖아요. 그런데 같이 출연한 전무송 씨가 리딩 때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이 여자는 천사야'라고요. 그래서 소영이 사람을 대신 죽여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자존감을 잃었을 때 얼마나 모욕적인 기분이겠어요. 그래도 사람을 죽이는데 마냥 쿨해질 수는 없을 것 같더라고요. 할 수 있는 건 우는 것밖에 없어서 그렇게 울면서 촬영을 했어요."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윤여정은 "오래 전부터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해왔다"며 "죽음을 터부시하지만 그냥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얻은 결론이었다.
"하버드 교수가 쓴 '웰 다잉'에 대한 책을 봤는데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면 답은 없대요. 대신 결론을 내린 게 자기가 하던 일을 하면서 죽는 것이더라고요. 나도 내가 배우를 하다 죽으면 참 좋은 일이겠죠. 물론 내가 90이 넘어서도 여러분이 나를 보며 '아직 살아계시네요'라고 하면 할 말이 없겠지만요(웃음). 지금은 목표 같은 것이 없어요. 연기의 의미 같은 것도 없고요.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그저 앞에 있는 일을 해결하면서 하루하루를 살려고요."
사진/CGV 아트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