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채 상반기 146조 원 역대급 발행, 그러나 '차환 일변도'
BBB급도 양극화…두산퓨얼셀 ‘완판’ 사례
내년 만기 폭탄, 기업 체질 개선이 관건
◆기업 펀더멘털 따라 '옥석 가리기' 들어간 회사채 시장
국내 회사채 시장은 올해 상반기 146조원에 육박하는 발행 실적을 기록하며, 반기 기준으로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상반기 회사채 발행액은 145조 6986억원으로 작년 동기 대비 9.3% 증가했다. 그러나 화려한 숫자 이면에는 불편한 진실도 숨어 있다. 발행 자금의 80% 이상이 기존 빚 상환에 쓰이는 '차환 일변도' 구조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김상인 신한투자증권 선임연구원은 "남은 8월에도 1조원 이상 발행이 예정돼 있고, 이런 흐름은 하반기에도 이어질 것"이라며 "회사채가 은행 대출보다 비용 측면에서 유리해 순발행 기조 증가와 그에 따른 차환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용건 한국신용평가에서 Ratings 그룹 총괄본부장(상무)는 "기업 활동에서 차환 자체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전제했다. 다만 "차환율이 80%대까지 높아진 건 성장 투자 여력이 사실상 고갈됐다는 신호로도 해석 가능하다"며 "이는 곧 경제 활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간접 지표"라고 설명했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 역시 "금리가 내려간다고 해서 차환이 무조건 원활해지는 건 아니다"라며 "등급이 한 단계만 내려가도 조달 금리가 급등하고, 그 순간부터는 발행 자체가 막힌다"고 지적했다. 그는 "회사채 신규 발행보다 차환 자체가 많아지는 건 시장이 건강하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구조적으로 위험이 누적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덧붙였다.
김 선임연구원은 "차환은기업들이 기존 부채를 관리하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도 있기에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면서도 "이런 구조가 장기화되면 신규 투자 여력이 줄고 기업 체질이 약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시장 환경 속에서, 최근 회사채 시장에서는 '극단적인 옥석 가리기'가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CJ CGV다. 올해 초 500억원 모집을 목표로 회사채 수요예측을 진행했지만, 기관 투자자 주문이 목표치에 크게 못 미치며 150억원가량이 미매각됐다. 그 결과 금리를 높여서야 가까스로 발행을 마무리했다. 업황 불확실성과 실적 부진이 겹치면서 투자자들이 등을 돌린 대표적 사례다.
롯데건설도 상황은 비슷했다. 지난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리스크가 불거진 이후 수요예측에서 기대치를 채우지 못해 일부 미매각을 겪었다. 당시 업계에서는 "부동산 경기 침체와 PF 익스포저 부담 때문에 신용등급 'A' 수준에도 불구하고 투자자들이 기피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업황 자체가 불투명하니 시장에서 사실상 외면을 받은 것이다.
다만 모든 BBB급이 외면받는 것은 아니다. 두산퓨얼셀은 지난 20일 400억원 규모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630억원의 주문을 확보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올해 초 일부 미매각을 겪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모든 트렌치가 완판됐다.
김 선임연구원은 "하위등급 전반이 다 외면받는 것은 아니다"라며 "기초 체력이 있는 BBB급은 수요가 몰릴 수 있다. 두산퓨얼셀처럼 모회사의 지원 기대가 있고 발행 규모·만기가 짧으면 투자자 관심이 오히려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IB업계 관계자도 "이 같은 단기적 수요는 구조적 경쟁력 개선과는 다른 문제"라며 "결국 펀더멘털이 담보되지 않으면 차환 리스크는 해소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구조조정 없이는 시장 안정도 없다
특히 현 시점에서 위기 국면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곳은 석유화학 산업이다. 정부와 10대 석화기업은 최대 370만 톤의 나프타분해시설(NCC)을 감축하고, 연말까지 자구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구윤철 부총리는 "소나기를 피한다는 안이한 인식으로는 위기를 절대 극복할 수 없다"며 "사즉생의 각오로 과잉설비를 줄이고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와 금융당국도 기업 구조조정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부는 향후 업계에서 제출하는 사업재편계획에 대한 타당성 및 기업들의 자구노력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 이에 필요한 금융, 세제, R&D, 규제완화 등 지원패키지를 마련해 뒷받침할 예정이다. 다만 권대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무임승차 기업에는 단호히 대응하겠다"며 "기업과 대주주가 뼈를 깎는 자구노력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신평사들 역시 "석화나 건설 업종의 BBB급 기업은 내년 상반기 대규모 만기 도래 때 가장 큰 리스크에 직면할 것"이라며 "구조조정이나 증자, 자산 매각을 통해 시장 신뢰를 회복해야만 차환이 가능하다"고 경고했다. 김 본부장은 "기업들이 일시적 실적 부진을 겪을 수는 있다"면서도 "EBITDA 대비 이자 비용이 구조적으로 악화돼 이자조차 감당 못하게 되면 신용등급 강등은 불가피하다"고 언급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역대급 회사채 만기 도래가 예정돼 있는 내년 상반기를 분수령으로 보고 있다. 실적이 개선되는 업종은 무난히 차환에 성공하겠지만, 영업이익이 줄고 재무구조가 악화된 기업은 구조조정 없이는 버티기 어렵다는 평가다.
김 선임연구원은 "내년 상반기에 역대급 회사채 만기가 몰려 있다"며 "기업들이 연말부터 선제적으로 발행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이런 전망 속에서 김 본부장은 "결국 중요한 건 일시적 악화인지 구조적 문제인지를 구별하는 것"이라며 "일시적 악화라면 투자와 다각도의 증자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지만, 구조적으로 펀더멘탈이 무너진 기업은 차환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때는 증자·자산 매각 같은 뼈를 깎는 노력이 불가피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올해 KDI는 한국 경제성장률을 0.8%로 전망하며 "부동산 PF 지연으로 건설투자 회복이 늦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낮은 성장률 속에 기업의 성장 투자 부재, 차환 의존도 심화가 맞물리면 한국 경제의 체질은 더욱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IB업계 관계자는 "차환이 계속 늘어나는 건 시장이 건강하지 않다는 증거"라며 "기업 체질 개선이 없다면 금리 인하만으로는 답이 안 된다"고 말했다. 신평사 관계자도 "시장 안정은 정부 지원이 아니라 기업 펀더멘탈 강화에서 시작된다"며 "한계 기업의 구조조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못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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