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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사주속으로] 풍수 한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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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에 힘입어 도읍과 성읍지를 정한 근례는 이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였다. 이런저런 얘기들이 전설처럼 전해지지만, 실제적인 일이라고 믿는다. 가장 가까운 옛날에도 좋은 묘택지는 찾는 것은 필사적이었다. 조선 시대의 성군인 세종대왕릉도 처음엔 지금처럼 여주에 있지 않았다. 세종은 자식이 많았으나 장자 문종은 병약했고 차남인 수양대군은 야심으로 문종 사후에 왕위에 오른 조카를 쫓아내고 왕위 찬탈한 것만으로 부족해 단종을 죽게 한다. 세종의 다른 아들들 여섯 명은 수양대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후에 수양대군이었던 세조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예종은 이러한 비극의 원인을 조상의 무덤 때문이라 추정하고 세종의 무덤을 열기로 하였다.

 

이는 당대에도 음택 풍수에 대한 통념이 확고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선조의 묘를 연다는 것은 보통 명분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열어본 결과 세종의 묘는 썩지 않은 시신과 관을 삼켜버린 물이 있었으니 왕가의 불행이 일어난 원인으로 지목하게 된 것이다. 예종은 세종대왕릉을 이장하기로 하며 명당을 물색한 결과 이미 당대의 명망 있는 가문이자 조정 대신이었던 이인선이 묻힌 묘자리였다. 예종의 압박으로 이인선 가문은 묘터를 이장할 수밖에 없었고. 세종대왕릉의 이전으로 조선왕조는 백 년 정도를 더 유지되었다는 설도 있다. 국토의 70%가 산이니 높은 험산을 제외하고 나면 적당한 높이의 배산임수 지형을 찾기는 쉽지가 않다. 성씨별로 각 종중과 문중마다 이미 차지한 곳을 제외하면 더더욱 그렇다. 조선시대와 비교하면 인구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화장문화가 일반화된 요즘은 매장도 어렵기만 한 상황이다. 음택 풍수가 힘을 발휘하기는 그림의 떡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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