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잊고 있던 환율 1500원의 공포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당국은 시장 안정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2일(현지시간) 블룸버그와 인터뷰에서 "환율이 과도하게 움직일 경우 개입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정부는 국민연금과 한은의 외환스와프 한도도 늘렸다.
하지만 추락하는 원화 가치를 방어하기에는 모자라보인다. 고환율은 당장 우리 삶과 경제를 조여오고 있다. 중소기업들은 환율이 오른 만큼 늘어난 수입 결제대금을 감당해야 한다. 대기업도 외화부채 부담에서 자유롭지 않다. 고환율은 한동안 '짖지 않던 개(The Dog That Didn't Bark·물가)'를 다시 깨울 수 있다. 이는 서민들의 삶을 팍팍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원·달러 환율 천장 뚫렸다
이 총재는 원화 약세의 주요 원인으로 미국 인공지능(AI) 주식의 변동성을 비롯해 한국과 미국 간 무역협상, 일본 엔화 약세 등을 꼽았다. 그는 "최근 한국 외환시장이 대내외 불확실성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서학개미(해외 주식투자자) 해외투자 증가세는 원·달러 환율 하단을 높이는 구조적 요인으로 꼽힌다.
문다운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내국인 해외증권투자가 급격히 확대되면서 시장에는 환율 상승압력에 대한 기대가 자리잡고 있다"며 "이때 수출 업체들은 단기 환율 고점에서 달러를 매도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달러를 보유하려는 유인이 확대된다"고 했다.
올해 1∼8월 거주자 해외증권투자액은 886억5000만달러다. 같은 기간 외국인 국내증권투자(205억 3000만달러)의 약 4.3배였다.
우리만의 얘기도 아니다. 아시아 주요국들의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있다. 미국 경기 침체 우려로 달러화 가치가 하락했음에도, 글로벌 경제 불안으로 인한 위험자산 회피 현상과 관세 인상에 따른 수출 부진 우려가 더 강하게 작용하는 양상이다.
일본 외환 당국은 엔화 환율이 달러당 155엔 접금하자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가타야마 사츠키 일본 재무상은 이날 의회 질의응답에서 "최근 환율이 한쪽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면서 "엔화 약세의 부정적 영향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는 과도하고 무질서한 환율 움직임이 발생하지 않도록 높은 경각심을 가지고 주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중 대립은 위안화 약세를 부추긴다. 특히 중국 화폐에 대한 신뢰도 약하다. 중국은 지난 수십 년간 고속성장을 이뤄내며 세계 경제 2위로 올라섰다. 이러한 과실은 기술발전이나 인프라 확대도 있지만, '빚'(가계, 기업, 정부)만든 것이다.
◆'3고 위기' 재발 우려에 韓 경제 비상등
시장에서는 최근 원화 가치 하락은 심리적인 영향과 달러 수급 요인이 있지만,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이 반영된 결과라는 해석도 나온다. 원화가치가 달러는 물론 유로화·위안화·스위스프랑화 등 여타 주요 통화에 비해서도 약세를 보인다는 점 때문이다.
끝없이 치솟는 환율은 물가를 자극하고, 내수와 성장의 발목을 잡는 등 우리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는 기업들의 경영난과 체감 경기 악화의 요인이 된다.
당장 한국은행이 통화정책을 쓰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 총재는 "(경기 회복 속도가 잠재 성장 수준에 못 미치는) '마이너스 산출 갭'을 고려할 때 통화 완화 정책을 유지하는 게 한은의 공식 입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금리 인하와 폭 그리고 방향 전환 가능성은 앞으로 발표될 새로운 지표에 달려있다고 선을 그었다.
만일 환율이 1500원을 훌쩍 넘어설 경우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자극할 수 있다. 지난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4%를 기록했다. 1년 3개월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렇게 되면 금리 인하를 통한 내수 진작 카드를 쓰기 어려워진다. 고물가·고금리 장기화로 인한 소비 위축, 기업 투자 감소가 이어질 수 있는 셈이다.
고환율 낙수효과도 예전같지 않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이 10원 오를 때 수출기업의 영업이익은 평균 0.5~1% 늘어난다. 하지만 수입 의존도가 높은 기업은 1~1.5% 줄어든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등 정부는 환율이 널 뛸 때마다 "최근 대내외 요인으로 원화의 변동성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시장의 쏠림 가능성 등에 경계감을 가지고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있다"며 환율 방어에 나서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환율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외환보유액이 4000억달러 미만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올해 11월 기준 외환보유액은 4200억달러다. 국제결제은행(BIS)은 한국의 적정 외환보유액을 9200억달러로 권고한다. 외환시장 한 관계자는 "외환보유액이 고갈되면 국내에서 달러 유출이 빨라질 수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미·일 등과의 다자간 통화 협력 네트워크 복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한·미 협상 결과에 따라 한국은 연 200억 달러 한도로 총 2000억 달러를 미국에 현금 투자해야 한다. 일본은 미국과의 무제한 통화스와프라는 안전장치가 있어 대미 투자액 5500억달러를 감당할 여력이 있지만, 한국은 안정장치가 약하다. 그나마 최근 한·중 정상회담을 통해 70조 원 규모의 한중 통화 스와프를 연장한 것이 전부다. 미국이나 일본과의 통화스와프는 2008년, 2020년에 모두 종료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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