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이 좋은 연기를 만든다"…변하지 않는 기준
세 번의 '렌트', 반복 속에서 더 깊어진 '뮤지컬 배우'로서 변화
관객에게 닿는 배우로…무대를 통해 전하는 위로
"그 52만5600분의 귀한 시간들, 어떻게 재요 인생의 시간(Five hundred twenty-five thousand six hundred minutes How do you measure a year in the life)"
뮤지컬 '렌트'가 던지는 이 질문처럼, 배우 정다희에게 무대 위의 시간은 그저 지나가는 순간이 아니다. 수없이 무대에 올랐지만 같은 무대는 한 번도 없었고, 오래 이어온 배역일수록 고민은 더 깊어진다.
이 질문은 단순한 자기 점검이 아니다. 배우 정다희에게 연기는 표현의 기술이 아니라 전달의 방식이고, 무대는 결과물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래서 그는 매 공연이 끝날 때마다 같은 질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오늘 누군가에게 닿았는가."
◆ 우연에서 시작된 길, 스스로 택한 무대
정다희의 출발점은 뮤지컬이 아니었다.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하던 학생이었다. 음악을 좋아했고, 한때는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아이였다. 다만 조금 특별한 게 있었다면, 어린 나이에도 스스로를 냉정하게 바라볼 줄 아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일찍부터 인지했고, 이를 외면하지 않았다.
뮤지컬로 진로를 바꾸는 결정은 쉽지 않았지만, 의외로 계기는 단순했다. 강원도에 살던 시절 만난 음악 선생님이 그의 목소리를 먼저 알아봤고, 노래를 해보라는 권유를 건넸다. 그 한마디는 또 다른 선택으로 이어졌다. 서울로 올라와 실용음악을 준비하던 시기, 지도해주던 선생님들은 정다희에게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추천했다.
그때 처음 접한 작품이 '헤드윅', '렌트', '시카고'였다. 비록 실제 무대가 아닌 DVD로 보게 된 영화였지만, 그 경험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었다.
"'이런 장르가 있구나, 이런 식으로 캐릭터를, 그리고 나를 표현할 수 있구나'라는 전에 없던 충격을 받았죠!"
돌이켜보면 그의 진로는 치밀하게 계획된 '선택'이라기보다, 사람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어진 '흐름'에 가까웠다. 누군가의 권유, 누군가의 시선, 그리고 그 가능성을 믿어준 말들이 하나씩 쌓이며 지금의 방향을 만들었다.
입시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낯선 환경, 높은 경쟁률, 그리고 가족의 반대까지 겹쳤다. 하지만 그 시기를 버티게 만든 것도 결국 사람이다.
그는 "증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자신을 가능하다고 말해준 사람들, 그리고 그 말을 끝까지 믿어보려 했던 스스로에게. 뮤지컬 배우들이 다수 배출된 동국대학교 연극학부에 진학한 그는, 졸업 이후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 '렌트'로 이어진 시간, 배우를 만든 무대
정다희를 설명할 때 '렌트'를 빼놓기는 어렵다. 이 작품은 그의 배우 인생에서 단순한 대표작을 넘어, 배우로서의 변화를 함께해온 작품이다.
'렌트'는 1990년대 뉴욕 이스트빌리지를 배경으로, 가난과 질병, 예술과 사랑, 그리고 이별을 살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전 세계적으로 오랜 시간 사랑받아 온 대표적인 뮤지컬로, 국내에서도 수차례 공연되며 두터운 팬층을 확보해왔다. 정다희는 이 작품에서 냉철한 현실주의자이자 변호사인 '조앤' 역을 맡았다. 2020년 첫 참여 이후 2023~2024년, 2025~2026년까지 세 차례 같은 역할로 무대에 올랐다.
같은 역할을 반복하는 경험은 흔치 않다. 그러나 그 반복은 익숙함이 아니라 더 큰 질문으로 이어졌다. 시간이 쌓일수록 연기는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넘버와 동선은 익숙해졌지만, 무대 위에서 마주하는 감정은 더 복합적으로 다가왔다. 장면 하나, 대사 한 줄을 이전과 다르게 느끼게 되면서 같은 역할임에도 매번 새로운 고민이 뒤따랐다. 익숙함이 쌓일수록 연기가 쉬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느끼고 더 깊이 고민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특히 '렌트' 2막을 대하는 정다희의 감정은 이전과는 분명 달라졌다. 예전에는 이해하려 애썼던 장면들이, 이제는 더 직접적으로 와닿기 시작했다. 가까웠던 관계가 멀어지는 순간이나 이별을 받아들이는 방식, 시간이 지나며 생기는 거리감 같은 감정들이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예전엔 크게 와닿지 않았던 감정들이 지금은 훨씬 크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세 시즌 연속 '조앤'으로 무대에 올랐지만, 매번 느끼는 감정은 달랐다. 일부러 연기를 바꾸려 하기보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표현이 달라졌다. 그래서인지 '렌트'를 대하는 마음도 다르다. 다른 작품은 마지막 공연이 다가오면 일정이 끝난다는 안도감도 함께 들지만, 이 작품은 끝이 가까워질수록 아쉬움이 더 커진다.
정다희에게 '렌트'는 한 시즌으로 끝나는 작품이 아니다. 배우로서 방향을 잡게 해준 작품이자, 지금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기준이다. "이 작품은 마지막 공연(막공)이 다가올 수록 헤어지기 싫어서 우울해질 정도예요."
조앤을 반복해온 시간은 또 다른 변화를 만들었다. 조앤을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모린이나 콜린 같은 다른 인물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겼다.
같은 역할을 반복해온 시간은 또 다른 변화를 만들었다. 하나의 역할을 오래 맡아온 경험이, 다른 역할까지 바라보는 시야까지 넓혀준 셈이다.
◆ 버티게 하는 이유, 결국 관객의 눈빛
뮤지컬 배우의 삶은 흔히 화려하게 소비된다. 조명과 박수, 커튼콜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그 뒤에 있는 시간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정다희는 이 직업을 "보여지는 게 90%인 직업"이라고 말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관리해야 하고, 언제든 일이 끊길 수 있는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 화려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균열이 존재한다.
실제로 그는 공연 중 낙상 사고로 큰 부상을 입었다. 십자인대와 연골이 파열되는 부상이었고, 긴 재활의 시간을 거쳐야 했다. 제작사의 문제로 충분한 보호를 받지 못했던 상황까지 겹치며, 배우로서의 삶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시기를 견뎌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는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책임져야 할 반려견 '소망이', 곁에서 손발이 되어준 남동생, 그리고 함께 무대를 지켜온 동료 배우들이 있었다.
결국 정다희를 다시 무대에 서게 만드는 이유는 '관객'이다. 그는 매 공연이 끝난 뒤, 그날의 무대가 누군가에게 어떻게 닿았는지를 돌아본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분들의 눈을 보면 오래 남아요. 그분들이 오늘 무엇을 느끼셨을지 생각하게 돼요." 그에게 연기는 '표현'이 아니라 '전달'에 가깝다. 누군가에게 감정이 닿는 순간, 그때 비로소 공연의 의미가 완성된다.
◆ 더 깊어진 배우, 변하지 않는 기준
데뷔 초의 정다희는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목표였던 배우였다. 주어진 역할을 끝까지 해내는 것, 흔들리지 않는 것, 그 감각 하나로 무대를 버텨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무대는 단순한 목표를 넘어 더 깊은 의미를 갖게 됐다. 이제 그는 잘하는 연기보다 '좋은 연기'를 고민한다.
"노래는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관객이 보러 오는 건 결국 '사람'이잖아요. 이 인물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걷고, 어떻게 바라볼지를 계속 고민해요."
그에게 연기는 보여주는 기술이 아니라, 인물을 살아내는 과정이다. 그래서 무대 위보다 무대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고민에 쏟는다. 그 질문들이 쌓여야 비로소 무대 위에서 한 사람으로 설 수 있다고 믿는다.
시간이 흐르며 태도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열정으로 밀어붙였다면, 지금은 인물에 대한 책임감을 먼저 생각한다. "이제는 제가 잘해 보이는 것보다, 이 인물이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기준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좋은 사람이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다고 믿어요." 완벽한 기준은 아닐지라도,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태도로 살아가려는 마음.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배운 것들을 무대 위에 담아내는 것.
그는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힘들 때 붙잡아주고 다시 일으켜 세워준 사람들. 그 존재들이 있었기에 무대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정다희에게 무대는 혼자 완성하는 공간이 아니다.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결과에 가깝다.
동시에 그는 더 넓은 가능성도 바라보고 있다. 무대에서 쌓아온 감정과 연기를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에게 닿게할 수 있을지, 조심스럽게 생각해보는 요즘이다. 그에게 확장은 '다른 길'이 아니라 '이어지는 길'이다. 그럼에도 중심은 분명하다. 정다희에게 무대는 직업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닿기 위한, 가장 그다운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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