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냉장 진열대에 삼각김밥이 줄지어 놓여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급한 한 끼라고 부른다. 누군가는 외로운 도시인의 밥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곳에 역설이 있다. 방금 지은 뜨거운 밥보다, 차갑게 식은 밥이 몸에는 더 좋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인은 오래전부터 "따뜻한 밥 한 끼"를 위로라고 여겨왔다. 김이 피어오르는 솥밥. 어머니가 데워주던 찬밥. 국그릇 위로 번지던 겨울 새벽의 수증기. 우리의 밥상은 늘 온기의 문화였다. 하지만 과학은 이제 다른 질문을 던진다. "정말 뜨거운 음식만이 몸에 좋은 음식인가."
식품과학 분야에서 주목받는 연구분야 가운데 하나가 '저항성전분(Resistant Starch)'이다. 용어는 어렵지만 원리는 인간적이다. 쉽게 말하자면 빠르게 분해되지 않고 대장까지 내려가는 전분이다. 그리고 장 속 미생물의 먹이가 된다. 빠르게 흡수되지 않고 천천히 반응한다. 마치 과속 사회를 거부하는 탄수화물과도 같다. 우리는 지금 너무 빨리 먹고 있다. 배달앱은 20분 안에 음식을 가져온다. 편의점은 24시간 불을 끄지 않는다. 전자레인지는 3분 안에 식사를 완성한다. AI는 개인 맞춤 영양을 계산하고, 로봇셰프는 쉼 없이 볶고 튀긴다.
그런데 인간의 몸은 점점 더 느린 음식을 원하기 시작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초고속 시대의 해답이 '식은 밥'이라니. 갓 지은 따뜻한 밥은 소화가 빠르다. 탄수화물이 빠르게 포도당으로 바뀌며 혈당을 급격히 올린다. 하지만 밥을 식히면 일부 전분의 분자 구조가 변한다. 소장에서 쉽게 분해되지 않는 형태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항성 전분이다.
식품공학적으로는 전분의 노화(retrogradation) 현상이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표현하면, "식은 밥이 천천히 몸을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인의 몸은 지금 속도의 충격 속에 살고 있다. 빨리 먹고, 빨리 흡수하고, 빨리 혈당이 오르고, 빨리 배고파진다. 현대인의 식사는 '식사'보다 '주입'에 가까워졌다. 풍요의 시대인데 영양은 빈곤하다. 건강식 콘텐츠는 넘치는데 폭풍흡입으로 인한 대사질환은 늘어난다. 연결된 사회인데 혼밥은 더 많아진다. 우리는 음식의 본질보다 효율을 먼저 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최근 해외연구 논문들은 저항성전분이 단순한 탄수화물이 아니라 장 건강과 대사 건강에 중요한 역할을 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영국 뉴캐슬대 연구진이 진행한 장기 연구는 흥미롭다. 린치증후군 환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국제 임상시험에서 저항성전분을 꾸준히 섭취한 그룹은 상부 소화관 암 발생이 현저히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식도·위·담도·췌장·십이지장 같은 부위에서 예방 효과가 두드러졌다는 점은 식품영양학계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우리가 흔히 덜 익어 맛이 없다고 생각하던 푸른 바나나 속에 저항성 전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었다. 너무 익기 전의 바나나는 소장에서 완전히 소화되지 않은 채 대장으로 내려가 발효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장내 미생물 환경 변화에 관여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참 묘한 현상이다.
현대 영양학은 가장 첨단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결국 인간 몸의 답은 오래된 자연 속에 숨어 있다. 생각해보면 한국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저항성전분을 먹고 있었다. 식은 주먹밥, 농촌의 새벽 들판에서 먹던 찬밥 한 덩이, 시장에서 장사하던 어머니의 식은 도시락, 우리는 그것을 가난의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대는 다시 그 음식을 건강의 언어로 부르고 있다. 미래는 때때로 과거의 얼굴로 돌아온다. 한국 음식문화의 핵심은 원래 '느림'이었다. 김치는 기다림이었다. 된장은 시간을 먹는 음식이었다. 막걸리도, 식혜도, 장독대의 발효도 모두 천천히 삭아야 완성됐다. 우리는 그것을 "슬로우 푸드"라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의 식문화는 완전히 달라졌다. 즉시성의 시대다. 배달앱은 늦으면 별점이 떨어진다. 전자레인지는 기다림을 제거했다. 플랫폼은 인간의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갠다. 우리는 이제 음식조차 '콘텐츠 소비'처럼 먹는다. 짧게. 빠르게. 자극적으로,, 그 결과 인간의 장은 지쳐가고 있다. 장내 미생물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식품산업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예전의 HMR(Home Meal Replacement, 가정식 대체식품)은 단순히 오래 보관되고 빨리 먹을 수 있으면 됐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혈당 반응. 장내 미생물. 대사 건강. 포만감 지속성. 이런 요소까지 고려하기 시작했다. 센트럴키친에서는 냉각 공정 하나에도 기능성을 설계한다. 탄수화물의 구조까지 디자인하는 시대다. 과거 식품산업이 '맛'을 경쟁했다면, 미래 식품산업은 '몸의 반응'을 경쟁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푸드테크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AI는 이제 개인 혈당 데이터를 분석한다. 웨어러블 기기는 식후 혈당 변화를 실시간으로 기록한다. 개인 맞춤형 식단 플랫폼은 탄수화물 흡수 속도까지 계산한다. 인류는 더 빠른 인터넷을 만들었고, 더 빠른 배달 시스템을 만들었다. 음식을 먹기보다 속도를 먹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장은 지금, 식은 밥 한 숟갈로 뜨거운 문명에 조용히 저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윤열 기술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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