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단별 사업재편 결론 지연
감산 부담에 기업별 판단 유보
자율 구조조정 속도 한계
석유화학업계 구조조정이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중동 전쟁 이후 일부 제품 스프레드가 단기 개선되면서 설비 감축을 서두를 유인이 약해진 반면, 울산 신규 설비를 둘러싼 기업 간 셈법도 엇갈리고 있어서다.
4일 업계에 따르면 정부가 요구한 산단별 사업재편안 제출 이후에도 여수와 울산 등 주요 석유화학단지의 구조조정 논의는 최종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일부 지역은 합작법인 설립과 설비 통합 방식을 두고 협의가 이어지고 있으며, 울산은 신규 설비 가동 이후의 시장 영향을 따져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면서 사업재편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여수산단 내 LG화학·GS칼텍스 구조개편 프로젝트는 최종안 도출까지 시간이 걸리고 있다. 양측은 나프타분해설비(NCC) 일부 통합과 합작법인 설립 방안을 검토해 왔지만 지배구조 규제와 자산가치 평가 문제 등을 두고 협의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GS칼텍스는 GS에너지와 미국 셰브론이 각각 지분 50%를 보유한 공동 지배 구조여서, 사업재편 방향을 확정하기 위해 주요 주주인 셰브론 측을 설득하는 작업도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울산산단은 구조조정 셈법이 더 복잡하다. 정유사와 NCC, 후방 석유화학 공정이 맞물려 있고 업체별 원료 조달 구조와 설비 경쟁력도 달라 단순 감산이나 설비 통합만으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구조다. 공급 과잉 해소 필요성에는 공감대가 있지만 어느 업체가 먼저 감산이나 폐쇄 부담을 질지를 두고 이해관계가 엇갈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 2027년 초 상업 가동을 앞둔 에쓰오일의 샤힌 프로젝트도 핵심 변수로 꼽힌다. 울산 온산국가산업단지 일대에 조성되는 총 9조2580억원 규모의 이 설비가 본격 가동되면 지역 내 공급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기존 업체들은 샤힌 프로젝트 가동 이후의 시장 상황과 수익성 변화를 함께 따져야 하는 만큼 선제적 설비 감축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중동 전쟁 이후에도 기업들의 셈법은 한층 복잡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전쟁 여파로 중동 지역 석유화학 설비의 가동 차질이 장기화하거나 재가동이 지연될 경우 글로벌 공급 과잉 부담이 일부 완화될 수 있어서다. 중국 업체들이 그동안 이란산 원유와 나프타 등을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조달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 온 구조에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이 경우 국내 업체 입장에서는 당장 설비 감축에 나서기보다 전쟁 이후 공급 구조와 경쟁 구도 변화를 더 지켜보자는 판단이 나올 수 있다.
이 때문에 정부가 구조조정 속도를 높이려 해도 실제 기업들의 의사결정은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설비 감축은 단순한 생산 조정이 아니라 특정 업체가 손실 부담을 떠안는 문제인 데다 전쟁 이후 공급 구조와 경쟁 구도가 달라질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율 구조조정 방식으로 추진되는 만큼 각 업체는 주주 이해관계와 향후 업황, 감산·폐쇄에 따른 부담을 함께 따져 결론을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정부는 속도를 요구하고 있지만 실제 사업재편은 기업들이 손실 부담과 향후 업황을 따져 결정해야 하는 문제"라며 "전쟁 이후 시장 흐름을 더 지켜보자는 판단이 강해진 상황에서 특정 업체가 먼저 설비를 줄이겠다고 나서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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