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노조의 파업 사태는 극적인 타결로 일단락됐지만, 이번 사태가 남긴 사회적 파장과 과제는 여전한 논쟁거리다. 수억대 성과급이 화두였으나 본질은 우리 노동정책이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는 점이다.
노조가 문제 삼은 건 초과이익에 대한 보상이지만, 깜깜이 평가와 보상 기준의 불투명성에 대한 불만이 더 컸다. 사측 역시 파업 장기화를 감수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업계에서는 삼성이 막판 합의에 나선 배경으로 핵심 연구개발 인력의 이탈 우려를 꼽는다. AI 반도체와 고대역폭메모리(HBM) 경쟁이 사활을 건 전면전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노사 갈등이 길어지면 우수 인재 확보에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했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임금 분쟁의 틀을 넘어섰다.
과거 제조업은 '시간의 산업'이었다. 얼마나 오래 일했는지, 근속연수와 집단 생산성이 핵심 가치였다. 그러나 지금의 첨단 반도체 산업은 다르다. HBM과 차세대 AI 반도체, 첨단 패키징 경쟁은 소수 천재급 연구 인력의 역량이 좌우한다. 특정 엔지니어의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기술력이 수조 원 규모 사업의 성패를 결정하는 구조다.
글로벌 빅테크와 반도체 기업들은 이미 근무시간보다 결과와 책임을 중시하는 성과 중심으로 움직인다. 미국 등이 연구개발 인력에 대해 '화이트 이그젬션(고소득 전문직 근로시간 적용 제외)' 체계를 운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면 한국의 노동 제도는 여전히 과거 제조업 시대의 '시간 중심' 틀에 갇혀 있다.
장시간 노동의 폐해를 극복해 온 경험이 있는 한국 사회는 여전히 노동시간이 중요하다. 그러나 글로벌 첨단 산업의 냉혹한 현실도 외면할 수는 없다. 미국, 대만, 중국을 상대로 한 속도 경쟁에서 기술 개발 시기를 놓치면 도태뿐이다. 이제 인재 확보와 유연한 연구 환경은 그 자체로 국가 경쟁력이 됐다.
실제 현장의 인재 유출 우려는 이어지고 있다. 중국 기업들은 파격적인 고액 연봉으로, 미국과 대만 기업들은 높은 연구 자율성과 성과 중심의 보상을 내세워 한국의 핵심 인력들을 유혹한다.
위기의식은 최근 반도체특별법 논의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산업계는 반도체 R&D 인력에 한해 근로시간 규제를 유연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노동계는 장시간 노동의 부활을 우려했다. 여당과 야당 역시 첨단 인력의 특수성에는 공감하면서도 노동계의 우려를 고려해 사회적 합의와 안전장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신중론을 유지했다. 결국 여야와 노사 간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근로시간 특례 조항은 최종 법안에서 제외됐고, 이는 여전히 숙제로 남았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이미 몇해 전 '근로시간 적용제외제도 국제비교와 시사점 연구'를 통해 산업 구조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노동 제도를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난 지금도 논의는 공전 중이다. 그 사이 AI 반도체와 HBM을 둘러싼 글로벌 패권 경쟁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해졌다.
이제는 소모적인 찬반 구호를 넘어, 구체적인 제도 설계에 나설 때다. 미국식 제도를 무조건 이식하자는 게 아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한국형 화이트 이그젬션'은 일반 근로자가 아닌, 첨단산업의 일부 고소득 전문 연구개발 인력에 한해 근로 자율성을 주되 그에 걸맞은 책임을 지우는 방식이다.
삼성 노조 사태가 보여준 교훈도 명확하다. 자율성과 성과 중심 체계는 투명한 신뢰가 전제되어야 작동한다. 우선 성과 평가와 보상 기준의 전면적인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초과 성과에 대한 확실하고 파격적인 보상 체계, 무제한 노동을 막기 위한 휴식권 및 건강권 보호 장치 제도화를 담아야 한다. 주식보상(RSU)이나 장기성과급(LTI) 등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춘 보상 다양화도 필요하다.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 역시 찬반 논쟁의 단순한 중재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반도체특별법에서 매듭짓지 못한 과제를 다시 식탁 위로 올려야 한다. 국가 첨단 경쟁력 확보와 노동자 보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정교한 제도 설계에 속도를 내야 할 시점이다.
삼성 노조 사태로 질문은 던져졌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인재들이 한국 땅에 남아 신나게 일할 수 있도록, 우리는 어떤 노동 시스템을 선물할 것인가. 그 답을 미룰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다.
Copyright ⓒ 메트로신문 & metroseoul.co.kr
Copyright ⓒ Metro. All rights reserved. (주)메트로미디어의 모든 기사 또는 컨텐츠에 대한 무단 전재ㆍ복사ㆍ배포를 금합니다.
주식회사 메트로미디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17길 18 ㅣ Tel : 02. 721. 9800 / Fax : 02. 730. 2882
문의메일 : webmaster@metroseoul.co.kr ㅣ 대표이사 · 발행인 · 편집인 : 이장규 ㅣ 신문사업 등록번호 : 서울, 가00206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2546 ㅣ 등록일 : 2013년 3월 20일 ㅣ 제호 : 메트로신문
사업자등록번호 : 242-88-00131 ISSN : 2635-9219 ㅣ 청소년 보호책임자 및 고충처리인 : 안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