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공정 지방 가능, 전공정은 생태계 통째로 이전해야"
수십조원 규모 투자. 인력 필요
전공정, 최소 5년~10년 장기계획
단군이래 최대규모의 호남 반도체 투자 논의가 패키징 등 후공정을 넘어 전공정 팹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 관련 기업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후공정은 지방 배치가 가능하지만 전공정은 수십조원 규모 투자와 전문인력, 협력사 생태계, 전력·공업용수 확보가 함께 이뤄져야 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정책 목표와 별개로 기업들은 수익성과 생산 효율, 공급망 안정성을 함께 고려할 수밖에 없다.
23일 업계와 정치권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은 오는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국토공간 대전환' 관련 민관합동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회의에는 전영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과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등 주요 기업 관계자들도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30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광주에서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을, 다음 달 2일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충남 아산에서 AI 데이터센터 투자 계획을 발표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다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투자 규모와 입지, 공정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논의되는 사안으로 회사가 확인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업계 일각에서는 기업이 답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로 전공정과 후공정의 비대칭성을 꼽는다.
정부 구상 초기에 호남은 후공정 거점으로 거론됐다. 산업통상부는 지난해 말 수도권 반도체 생태계를 광주(첨단 패키징)·부산(전력반도체)·구미(소재·부품)로 잇는 '남부권 반도체 혁신벨트' 구상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전공정 시설까지 유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해졌다.
후공정은 입지 선택이 비교적 자유롭다. SK하이닉스가 미국 인디애나주에 38억7000만달러(약 5조2000억원)를 투자해 AI 반도체용 첨단 패키징 시설을 짓기로 한 것도 고객사와 가까운 곳에 공급망을 두려는 전략적 판단으로 풀이된다. 광주에는 글로벌 후공정 기업 앰코테크놀로지가 생산거점을 운영하고 있어 호남도 후공정 거점으로는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전공정은 차원이 다르다. 웨이퍼 제조와 증착·식각 등이 이뤄지는 전공정 팹은 공장 하나를 짓는 문제가 아니라 반도체 생태계 전체를 새로 조성하는 사업에 가깝다.
우선 투자 규모가 부담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 2월 용인 클러스터 1기 팹 건설에 21조6000억원을 추가 투자하기로 공시했다. 2024년 7월 발표분 9조4000억원을 더하면 1기 팹에만 약 31조원이 투입된다. 인디애나 후공정 공장 투자액의 약 6배 수준이다.
건설 기간도 길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달 2일 대만 컴퓨텍스 2026에서 "새 팹은 최소 3년, 맨땅에서 시작하면 5년 이상 걸린다"고 말했다. 이마저도 기존 단지에 증설할 때의 분석으로 부지부터 새로 닦아야 하는 호남 전공정 팹은 더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메모리 호황으로 증설 속도가 관건인 만큼, 여기에 용수와 협력사 확보까지 더해지면 적기 공급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인력 확보도 쉽지 않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KSIA)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인력은 2031년까지 약 5만4000명 부족할 전망이다. 박사급 연구개발(R&D)·생산기술 인력이 평택·화성·이천에 집중된 만큼, 호남 신설 팹은 인력을 새로 확보하거나 이주시켜야 한다.
협력사 이전도 난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변에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들이 밀집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전공정 팹을 호남에 지으려면 이들 협력사도 함께 옮겨가거나 새로 투자해야 한다. 수백 곳에 이르는 협력사가 물류비와 인력난을 감수하며 동반 이전하기는 쉽지 않다. 맥킨지는 기존 집적지를 벗어난 신규 입지는 협력사 생태계의 이점을 누리기 어려워 운영비가 최대 35% 높아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양사가 지방 투자를 외면하기는 어렵다. 정부가 균형발전을 핵심 정책 과제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8월 시행되는 반도체특별법은 클러스터 지정 시 지역 균형발전을 고려하도록 규정했고 시행령 초안에는 신규 클러스터를 수도권 외 지역에 조성하는 방안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부는 이달 재정·금융·인력·인프라 등 7종 지원책을 제시했다. 호남이 국내 최대 재생에너지 거점인 만큼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 대응에 유리하다는 점은 기업들이 지방 투자를 검토할 수 있는 배경 중 하나로 거론된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후공정은 입지 선택의 여지가 있지만 전공정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며 "대규모 투자와 전문인력, 전력, 공업용수, 협력사 생태계가 함께 갖춰져야 해 단기간에 추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이어 "급하게 추진할수록 기업 부담이 커지는 만큼 5~10년 장기 계획이 필요하다"며 "전공정은 공장이 아니라 반도체 생태계 전체를 함께 구축하는 과정"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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