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청 총장의 교육읽기] 하루만 더 살게 해주세요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할 때다. 80대 이웃 할머니는 자신의 소원을 '아들보다 하루만 더 사는 것'이라고 하셨다. 60세가 넘은 장애 아들 걱정 때문이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돌볼 사람도 없고 천대받을 것을 걱정한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장애아를 둔 부모들은 이 할머니와 같은 기도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많은 부모는 이와 다르다. 어떻게 하면 줄을 잘 세워 자녀를 1등으로 만드느냐가 대부분 부모의 바람인 현실이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깊은 내면을 보면 전혀 다르다. 진정한 사랑과 그렇지 않은 사랑의 이면인 셈이다. 전자는 부족하기 그지없어 홀로 생존하기 어려운 자녀를 보는 어머니를, 후자는 부모로서 역할만 잘해주면 보통 사람의 삶을 살며 행복할 수 있는 자녀들에게 '1등''일류 대학'이라는 멍에로 자식을 보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세계인의 약 10% 정도는 크고 작은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90%의 정상인이 이들과 더불어 살 때 그 사회는 아름다운 사회가 되고, 함께 교육할 때 그 교육은 아름다운 교육이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교육에서 장애인을 위한, 장애인에 대한, 장애인과 아픔을 나누는 교육은 거의 없다. '1등'에 매몰되는 경쟁 위주 교육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위대한 삶을 산 많은 사람 중 아픔과 고통, 멸시와 천대, 소외 속에서 자신을 키워온 장애인들이 적지 않다. 실낙원을 쓴 밀턴이나 상대성 원리를 창안한 아인슈타인, 위대한 사랑을 실천한 헬렌 켈러, 천 점이 넘는 위대한 화품을 그린 반고흐, 월광곡을 작곡한 베토벤 모두 장애가 그들의 위대함을 만들어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함께 사는 교육, 나누는 교육, 소외받고 부족한 이웃을 사랑으로 보듬는 교육, 자기 먼저가 아닌 우리의 교육, 그리고 헌신과 봉사와 섬김과 정직을 키우는 교육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환경 교육, 남녀가 만나 한 가정을 이룰 때 아름다운 가정을 가꾸기 위한 부모 교육,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을 사랑하는 소비자 교육,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존중하는 인권 교육, 아름다운 성을 추구하는 성교육, 다툼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며 화합을 추구하는 평화교육, 올바른 유권자가 되는 정치사회교육 등이 학교 현장에서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 특히 교육은 자기만이 아닌 모두를 위한 것일 때 진정한 가치를 발한다. 교육은 자기 입신이나 출세, 지위나 명예를 위한 수단도 아니다. 교육은 사람됨을 만드는 것이고, 사회에서 필요한 자질을 배양하는 데 있다. 세계의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히는 부탄이나 네팔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으뜸인 이유가 무엇인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교육이 참다울 때 참다운 삶을 만들어내고, 참다운 삶 속에 행복지수는 높아진다. 우리 인생은 교육에서 시작해서 교육으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삶 자체는 교육의 연속이다. 우리가 사는 환경은 학교이고 일생 우리는 학습자로 살아간다. 경쟁만을 추구하는 교육 현장은 하루속히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1등'만을 바라는 부모나, '하루만 더 살게 해주세요'라며 간절한 아픔을 느끼는 부모 모두 교육 안에 승화될 수 있다.